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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보반보 Dec 07. 2024

영어, 영어 어디에 써먹을까요?

“영어를 잘했더라면”에 담긴 한국인의 기대와 현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영어만 잘했어도 뭐든 할 수 있었을 텐데.”“영어만 잘했으면 더 바랄 게 없었을 거야.”“외국어를 유창하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면 뭐가 그렇게 좋을 것 같나요?”그러면 대답은 비슷합니다. “여행 가서 답답하지 않을 것 같고,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멋있잖아요."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여행 가서 그렇게 답답했던 적이 많이 있었나요? 외국어를 못해서 무섭거나 난처했던 순간이 많이 있었나요?” 그러면 그들은 또 질문에서 길을 찾습니다.
“아, 뭐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요즘은 통역 앱도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요즘 세상은 외국어를 못해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바뀌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렇게 외국어의 필요와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많이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서 여러분께 질문이 있는데요. 영어 잘하면 그 영어 한국에서 어디에 쓰면 좋을까요?


저는 50이 넘은 나이에 영어를 꽤 잘한다고 자부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영어를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전 영어 이외에 일본어를 한국에서 사용하지 못했던 경험이 먼저 있습니다.
저는 일본어도 유창하게 합니다. 일본대학 생활을 하며 일본어는 히로시마 대학에서 일본어능력시험 1급도 따고,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는 방식과 일본어 사투리까지 다 익혔습니다.


일본 대학에선 학생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제이름 또한 "하야시 요시히데에 "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일본식으로 부르는 이름을 그저 단순하게 생각했고 이질감보다는 새롭다는 느낌이 더 컸습니다.

“ 하야시상 불러도 한동안은 나도 모르겠군” 하는 재미있는 상상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일본어와 영어얼마 큼의 수준인지 짐작하기 쉽게 하기 위함이며, 영어는 일본어에 비교하면 시작이 어렵지 깊이로 보면 더 쉽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다시는 말도 하기 싫었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습니다.


그렇게 학교 생활을 어느 정도하고 있다 보니 굳이 학생들 이름이 고유명사인데 일본식으로 바꿀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을 때즈음 어느 날 중국인 학생 1명과 뉴질랜드 학생 1명입국이 늦어 뒤늦게 등교를 하였습니다. 출석시간에 중국인들이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출석한 중국인 학생 이름의 일본식 발음이  중국어 발음으로는 어느 물건과 같아 웃기다고 합니다. 내가 듣기에 그다지 웃긴 물건도 아니었던 것 같지만, 모두 여학생들이고 아직 나이들이 어려서 그런지 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어느 날, 중국인 그 여학생이 자신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부르는 게 불편하다며 강의실에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고유명사이니 원래 발음 그대로 불러야 한다”라고 용기 내어 말했지만,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교수는 그 학생의 발언을 비웃어가며 무시하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그런 일본어 실력으로 어떻게 입학했는지 의심스럽군요”라
는 말을 들은 학생은 더더욱 화가 나서 맞섰습니다.


 “일본이 사용하는 한자는 원래 중국 것이고, 일본에서 쓰는 한자는 중국의 중학생 수준이다. 내가 말을 잘 못할 뿐이지, 당신들이 쓰는 글자는 매우 쉽기 때문에 다 이해한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날 강의실은 소란스러워졌고, 용기 내어 최선을 다해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중국학생에게 교수가 구시렁대며 하는 발언을 들으니 한국인 저 또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어 발음에 R 발음이 많아서 전달력이 좀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그 중국 여학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의미전달을 정확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의 일본인이라면 외국인이 하는 일본어에 겉치레라도 대략 알아듣고 말을 해 주었을 텐데 교수님 스타일이 엄격했던 분이셨는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교수라는 직함으로 필요 이상의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하는 모습을 더 이상 저는 듣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교수의 행동을 지적하며 말했습니다. “학생이 최선을 다해 소통하려는 노력을 조롱하는 건 교수로서, 또 일본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녀의 말이 맞습니다. 학생들의 이름은 고유명사입니다. 원래 이름대로 불러주는 것이 맞습니다. 뉴질랜드학생 니콜은 “ 니코루상” 한자가 없다는 이유로 일본인 최선의 발음으로 이름을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학생들의 요구는 정확한 발음을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본인들의 이름 또한 일본인 최선의 발음 그대로 불러달라는 겁니다. ”


그 일로 저는 교수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하며 여러 가지의 집단 따돌림이 시작되었습니다만, 끝내 문제를 바로잡아 그 교수 외 두 명을 학교에서 퇴사시키는 싸움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교수들의 집단 따돌림의 힘듬은 세상에 있는 어떤 문장으로도 표현하기 힘듭니다. 그만큼 저는 일본어를 제 뼈에 한자씩 한자씩 새겨 넣었다고 할 만큼 잘합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 일본어를 써먹을 곳이 없었습니다. 한때 일본어가 각광받았던 시절도 지나고, 중국어 붐이 오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누가 일본어를 해요?” 그 뒤로 저는 일본어를 잘한다는 말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의 영어도 나의 일본어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나의 한국어 말투는 아주 깨끗하게 돌아왔습니다. 요즘은 긴장해도 한국말이 어눌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묻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영어를 잘하면, 대체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 걸까요?


 이렇게 두 가지 언어의 경험을 다 하고 나니 나만의 깨달음이 있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할 때 남이 하기 때문에 가 아닌, 내 인생을 앞으끌고 갈 방향성을 멀리 내다보고 필요하다면, 그리고 계속 배워서 사용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결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정된 방향성의 목적에 외국어든 기술이든 필요하다면 힘을 쏟는 게 현명한 처신인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외국계 항공사 본사를 다녔습니다 외국어가 재미교포 수준의 직원들과 생활하며 승진과 출장의 기회를 잡기 위해 필요했으며 저와 잘 맞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들 교류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저에게는 쉽고 성취감까지 드는 편입니다.

그래서 후회는 없습니다. 해외에서 외국어를 사용하며 계속 살았다면 영어를 배운 후회는 더더욱 없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제 한국에서 살려고 합니다. 외국어서 살다 죽을 수는 없으니까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한국에서 다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외국어 활용의 한계를 많이 느낍니다.


두 개의 외국어를  장착한 나에게 느끼는 건 한국에서 사용할 수도 없는 영어에 불 필요한  많은 시간을 보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빠르게 바뀌는 한국에 와서  그동안 잊어버렸던 한국스타일의 걸음마를 다시 배우는 느낌입니다. 그것도 같은 한국인에게 꾸지람을 들어가며 한국인인 주제에 웬 외국인 행세야 뭐 이런 느낌으로...


요즈음 한국인은 오히려 외국인들에게 더 관대한 듯합니다.

외국생활을 오래 한 한국인은 그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오리지널 외국사람이 아니라고 천대받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기 위해 예전의 기억을 지워가며 한국사람답게 말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여기서는 조금만 노력을 하면 한국사람스럽습니다.

전 오리지널 한국인 이니까요.

사니까 살아지고 살아지니 또 살겠죠. 

고뇌하고 후회하고 아주 가끔 즐겁고 행복한 일도 마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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