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7. 0-0-57
신해철은 이 앨범에 「그대에게」를 다시 수록했다. 단순히 재수록만 하지 않고 해당 곡을 리노베이션했다. 기본 화음을 연주하는 데 그친 기존의 신디사이저 반주는 거두고, 연속음이 촘촘한 신디사이저 사운드를 도입하며 곡의 흥취를 한껏 끌어올렸다. 리얼 드럼을 전자 드럼으로 옮기며 킥 사운드를 보강했다 곡의 멜로디를 해치지 않는 적절한 톤의 기타 솔로 또한 입혔다. 「그대에게」는 비로소 해당 곡에 알맞은 속도와 덩어리 감과 지닌 곡으로 거듭났다. 이 앨범에 이르러 신해철은 마침내 훌륭한 키보디스트이자 프로듀서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리듬 구조에 특별히 신경 쓴 이 앨범의 편곡은 MIDI 음악의 질감을 강렬하게 어필한다. 이 앨범에 등장하는 키보드 연주는 거의 (전자드럼의 킥과 더불어) 타악기나 리듬 기타처럼 쓰인다. 「재즈 카페」의 고비마다 들리는 글리산도 주법의 키보드 연주도 그렇거니와, (몇몇 재즈 장르가 피아노를 일종의 타악기처럼 쓴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욱 놀랍기 그지없는 대목이다.) 이 앨범에서 가장 청명한 기운을 드러내는 「나에게 쓰는 편지」에서도 촘촘하게 직조한 MIDI 퍼커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렇게 장점은 최대화하고 단점은 최소화한다.
그이의 목소리는 때로 MIDI 음악의 빈약한 베이스 파트를 보충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전작에 비해 훨씬 낮은 목소리로 「다시 비가 내리네」나, 「50년 후의 내모습」을 부르는 그이의 보컬은 그이가 프로듀서의 관점에서도 곡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멈블’에 가까운 그이의 내레이션 또한 리듬에 맞춰 말하지 않던가.) 두 곡을 제외한 나머지 곡의 보컬과 코러스를 전부 맡은 그이는 「아주 오랜 후에야」나, 「재즈 카페」의 복잡한 코러스까지도 능숙하게 해낸다. 이 앨범의 ‘자의식’은 탄탄한 음악적 당위성을 토대로 삼았기에 더욱 타당하다.
앨범에서 거의 유일하게 밴드 세션을 동원한 명곡 「내 마음 깊은 곳의 너」는 (훗날 등장하는 N.EX.T의 걸작인) 「Here, I Stand For You」의 미학적 원형을 품고 있으며, 「길 위에서」의 웅장한 스케일은 그이가 나중에 N.EX.T를 통해 실천할 사운드의 밑그림을 미리 제시한 듯하다. 「아주 오랜 후에야」에 들리는 박청귀의 리듬 기타는 MIDI 음악이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질감을 밀도 높은 연주로 채운다. 「다시 비가 내리네」의 간주에 등장하는 (이 앨범의 크레디트에 그이와 같은 ‘뮤지션’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 이정식의 색소폰 솔로는 MIDI 사운드가 주는 곡의 질감과 구조에,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더한다.
‘니체’와 ‘컴퓨터 게임’이 교차하는 사유를 MIDI 음악에 끌어들인 사운드는 자신만의 표현을 모색하는 영리하고 유연한 프로듀서의 모습을 조망한다. 이 앨범의 상업적 성공은 이 조망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이 앨범의 사운드를 MIDI로 적극 채울 때도, 그이는 밴드 편성을 중심으로 한 편곡을 염두에 뒀다. 그이는 이 앨범 이후, 본격적으로 밴드 멤버를 모으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그이는 이 앨범으로 돌아오려 했다. 솔로 아티스트 신해철의 새로운 한 사이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나 싶었다. 안타깝게도 그 귀환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50년 후의 자신을 그린 그이의 자화상은 연필로 그은 선이 가득한 스케치로만 남았다. 나는 그 스케치에서 미완성이기에 영원히 진행형일, 끝나지 않는 젊은 지성의 무한 루프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