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앨범이 지금도 인터넷에서 ‘암약’하는 몇몇 ‘찌질이’를 훌륭하게 제압하고 있다는 사실에 개탄해야 할지, 아니면 감탄해야 할지. 누군가 아무 동영상에 ‘저 실력이면 국힙 반가량 정리 가능 ㅋㅋ’라고 댓글을 적을 때, 이 앨범은 그런 댓글을 다는 사람 반 이상을 정리한다.
분명한 점은 이 앨범이 「선고」로 인한 「망명」 이후에 나온 말을 다룬다는 점이다. 「편견」과 「누명」과 「선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저 연주곡의 뉘앙스로만 은밀히 말할 따름이다. 신디사이저 위주의 편곡, 브레이크비트를 자제한 미니멀한 사운드는 핵심을 빠르게 전달한다. 「누명」 속에서 버벌진트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훼손된다.
그이는 처음에 이 앨범을 리믹스 앨범으로 구상했다. 그 구상의 흔적이 이 앨범의 두 번째 시디나, (더 콰이엇의 곡에서 비트를 따온) 「망명」 같은 곡에서 드러난다. 「망명」에서 처음 들리는 그이의 랩은 직관적이다. 다음절 라임보다 효과적인 플로우와 또렷하게 들린다. 그이는 이 선택을 통해 역설적으로 ‘다음절 라임’ 또한 적확한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일갈하는 듯하다.
「망명」에서 약간의 「망각」이 이어지면서 이어지는 천태만상에 대한 불편한 묘사는 (오버클래스 크루 멤버들을 위시한) 버벌진트가 그들에게 내민 가운뎃손가락이다. 재미있게도 이 일련의 트랙에서 그이는 자기보다 후진 사람들을 디스하지만, 동시에 그게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이는 헤이터(Hater)의 언어와 개념을 빌려와 역으로 그들을 놀린다. 분명히 자신을 향해 놀리는 점을 알지만, 그게 누구인지를 쉬쉬할 때, 소위 ‘찔릴 사람’은 더 열받기 마련이다. 지적하자니 아니라고 부정하고, 부정하자니 계속 찔러댄다. 버벌진트는 자신이 받은 누명을 아주 정확하게 계산하여 이자까지 쳐서 되갚는다.
물론 그이는 헤이터에 대한 디스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바로 다음 트랙에서 그이는 피처링 없이 혼자 「Tight이란 낱말의 존재이유」와 「1219 Epiphany」를 이끈다. 그러나 이마저도 「배후」의 침몰을 겪는다. 수많은 부침 끝에 「Drunk」와 「The grind」에 다다른다. 이 두 개의 곡에서 다룬 (당시 한국 힙합이 주로 소재로 삼은) ‘가난’이 후지게 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앞서 말한 부패와 이별이 만든 현실주의적인 냉정함이, 이 두 곡에도 고르게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선한 의지’만으로 이끌었다면 한참 순화되었을 비참함을, 이 앨범은 제대로 훑는다. 이 앨범의 사운드는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이들의 편에 서는 듯이 들린다. 언더독에 대한 이야기도, 언더도그마에 대한 이야기도 공평히 다룬다. 힙합 신에 대한 그의 환멸로부터 얻은 지혜가 이 앨범의 유기적인 사운드와 더불어 앨범 전체에 고르게 퍼져있다.
「사자에서 어린아이로」와 「여여(如如)」의 차분한 사운드로 마무리된 이 앨범은 어떻게 보면 그이와 세상이 합작한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그이를 핍박하지 않았던들, 이 앨범이 이렇게 나올 수 있었을까. 물론 모든 예술가가 천형(天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도 방구석에 앉아 키보드만 두드리는 게 자랑인 사람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복마전에 주저하지 않고 들어가 자신만의 권법으로 힘겹게 승리를 쟁취하는 이 앨범을 들을 때면, 영웅은 결국 천형(天刑) 덕분에 빛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조심스레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