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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MIN Dec 16. 2024

『92년 장마, 종로에서』

Part 9. 91-63-29

  솔직히 말해, 나는 지금도 「비둘기의 꿈」이나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여기서 등장하는 박은옥의 목소리가 시리도록 아름다운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 곡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데도 그렇다. 이 앨범이 지금처럼 ‘호락호락’한 환경에서 나온 앨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그렇다. 「양단 몇 마름」이나 「저 들에 불을 놓아」에 드리운 박은옥 목소리의 묵은 슬픔이 내겐 도무지 걷힐 것 같지 않은 종류의 슬픔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앨범 안에서, 절망은 손에 잡힐 듯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최근에 이 앨범을 다시 들으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이 두 곡이 없었던들, 이 앨범의 후반부 곡들은, 특히나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드높은 절창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비둘기의 꿈」이 지닌 한 줌의 햇살이 없었던들, 이 앨범은 장마권에 든 하늘의 먹장 구름만 가득했을 테다. 바리톤 박장섭과 같이 부르는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 등장하는 정태춘의 목소리는 이 앨범이 나올 당시에도 연대의 힘을 놓을 수 없음을, 희망의 밝은 미래를 믿을 수 밖에 없음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전작인 『아, 대한민국』의 사설조를 버리고 삶의 모든 풍경을 담는 그의 노래는 후반부의 노래에 이어지는 풍경화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확실하게 알려준다. 희망을 바라보던 그이의 시선은, 후반부의 회한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현실에 닿는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의 콜라주적인 사운드가 파노라마 사진처럼 드넓게 주위를 둘러볼 때도, 「L.A. 스케치」의 유달리 긴 가사가 후반부의 총격으로 가닿는 대목도, 「나 살던 고향」의 뽕짝의 통속성이 이용해 국악과 만나 울음을 터트리다가, 이내 ‘고향’의 의미를 은근히 전복시키는 것도, 결국 정태춘이 이룬다는 점에 있다. 이 앨범에서 거의 편곡(과 기타)를 담당한 함춘호도 이 세 곡의 편곡(과 기타)만큼은 정태춘과 더불어 편곡(과 기타)를 담당했다. 시선은 앞부분의 곡에 비해 넓지만, 정태춘 개인의 목소리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촛점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앨범은 그 집중력을 간직하며 마지막 장으로 나아간다.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유달리 뭉클한 이유는 단조에서 장조로 넘어갈 듯 말 듯 이어지기 나가는 전환이 정태춘의 단조 멜로디와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한없이 단조 위주의 편곡만 맴돌다가 비둘기를 말하는 대목에 이를 때, 곡은 이상하리만치 뭉클한 장조 편곡을 언뜻 언뜻 드러낸다. 「저 들에 불을 놓아」의 걷힐 수 없는 슬픔이 티 없이 맑은 끝맺음을 맺을 때와 마찬가지로 결국 장조로 끝나지만, 이 곡은 그 과정과 전환 단계가 더디기 때문에 더욱 현실적인 맥락으로 성립했다. 정태춘의 목소리는 끝까지 단조 멜로디를 계속 유지하고 반복하며 기어이 애매한 희망을 이 땅에 정착시킨다. 박은옥의 목소리 또한 이 대목에 이르러 희망을 구체화한다. 흘러가던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기에, 결국 날아갈 거라는 은밀한 예지를 전하면서. 


  음반 사전 심의제에 대한 이들의 싸움 또한 처음에는 먹장구름을 작은 두 손으로 거둬내는 일이었을 테다. 이 앨범 자체를 발매하는 일이 곧 저항이지만, 이들은 그저 타는 불을 내버려둔 채로 회한과 피로와 힘겨운 나날을 고스란히 말한다. 이 앨범은 왔던 길을 톺아보며 앞으로 나갈 길을 다 잡는 앨범이다. 그래서 이 앨범이 지닌 회한의 깊이는 그들이 정말이지 힘겹게 발견한 희망의 깊이이기도 하다. 나는 간신히 되찾은 이 깊이가 소멸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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