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83-45-27
신디사이저를 배제하고, 하몬드 오르간과 피아노를 적극 사용하며, (엄인호의 셋째 형이자, 엄인호의 데뷔작은 ‘장끼들’서부터 세션으로 참가한) 엄인환의 알토 색소폰을 제외한 나머지 혼 섹션을 미군 출신의 혼 섹션을(그것도 트롬본을 두 대나) 섭외하고, 코러스를 (메인 싱어인 정서용을 포함하여) 다섯 명이나 기용한 이들은 본격적인 블루스 사운드를 다룰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전작의 얌전한 성격에서 탈피한 이 앨범의 사운드는 화려하고 풍성하다.
「바람인가, 빗속에서」나 (이 앨범의 명곡인) 「환상」의 화려한 사운드는 전작에 붙은 부정적인 꼬리표인 ‘감상용 음악’이라는 점을 단번에 뗄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고, 레게 리듬의 기타에서 연주를 이어받은 김현식의 애드리브가 작렬하는 「골목길」은 이 곡이 가수의 흉금을 온전히 곡에 쏟아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엄인호가 부르는 「루씰」 또한 바로 이런 점이 이 곡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듯하다. 이 앨범은 그 와중에도 (산울림의 버전으로 처음 발표된) 「황혼」을 부른 정서용의 목소리와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을 부른 김종진의 목소리 또한 무람없이 수용한다. 아니, 이 앨범의 블루스는 정서용과 김현식이 있었던 덕분에 성립이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동호회의 성격을 띤 이 ‘음악 집단’의 힘과 자유로움은 이 앨범에 이르러 한층 진화했다.
이정선 또한 이 앨범에서 자신의 훌륭한 곡을 실었다. 포크 블루스의 성격을 지닌 「아무말도 없이 떠나요」에 등장하는 그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는 단순한 듯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들리기 위해 셈여림을 잘 사용하여 섬세하게 연주한 솜씨가 일품인 곡이고, 「산 위에 올라」는 여태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일렉트릭 블루스 곡 중에서도 가장 호방하고 대범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그가 작사, 작곡하고 정서용이 부른 「빗속에 서있는 여자」는 뚜렷한 타건의 피아노 연주와 김효국의 하몬드 오르간 연주와 더불어 연주에 임하는 이정선의 특출난 일렉트릭 기타 솜씨를 들을 수 있는 숨은 명곡이다.
연주 면에서도 보컬 면에서도 전작에 비해 훨씬 풍성해진 이 앨범은 그래서 새로이 베이스로 참여한 이원재와 전작에 이어 다시금 드러머로 참석한 정태국, 피아니스트로 참석한 김명수와 하몬드 오르가니스트로 참여한 김효국의 공을 일일이 호명하며 함께 거론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을 제외한 앨범의 나머지 곡을 하나의 균일한 리듬 체계와 필링으로 한데 엮으면서, 이 앨범을 하나의 오롯한 앨범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정태국의 드러밍은 「산위에 올라」나, 「환상」과 같은 곡에서도 일정한 수준의 파워풀한 드러밍을 선보였으며, 이원재의 베이스 연주는 「루씰」의 엄인호의 목소리를 보충하기도 하고, 「빗속에 서있는 여자」의 중저음 파트를 책임지면서 앨범의 사운드를 굳건한 토대 위에 올렸다.
이 앨범의 '블루스'는 너무나 선명하고, 너무나 화려하고, 너무나 원초적이기 때문에 더더욱 쓸쓸하다. 이 앨범의 완벽한 ‘만남’이 기실 단 한 차례에 그치고 말았다는 사실 또한 이 앨범을 더욱 완벽한 블루스 앨범으로 만들 정도다. 그렇기에 이 앨범의 짙푸른 사운드를 돌아보는 일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푸른 행성을 돌아보는 일 같이 아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