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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오해/너와의 대화

by 봄날의 북극

"내가 완전히 소멸하고 나면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

"이전의 기억은 어떤 것도 간직하지 않고 마치 다른 사람인 듯 그렇게 시작하고 싶어"


"그럼 너는 완전히 지워지고 없어지는 거잖아. 온전히 새롭게 시작한다는 건 말 그대로 새롭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되는 거 아닌가?"

"너라는 존재는 지워지고 가치도 없는 오랜 유물처럼 사라지는 거 아닐까?"

"그래, 잊혀진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잊혀졌다는 것도 인지 못 하지 않을까?"

"그걸 완전한 종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야."

"네가 나를 기억할 테니 괜찮아. 나는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너는 나를 기억할 테니. 나는 지워지지도 잊혀지지도 않아."

"다른 존재처럼 보이겠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은 다시 시작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을 너도 알잖아."

"다만 나는 그 끝에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고 싶을 뿐이야."

"완전한 시작에서 출발해야지 나는 똑바로 설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거야."

"지금의 나는 너무도 불안정한 상태라 흐릿하게 지워져 잊혀지고 말 그런 존재일 뿐이야."

"그래서 지금, "

"바로 지금을 끝내고 나는 완전한 종식 그 끝에서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시작하고 싶어."


내가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것일까.

그는 분명 완전한 종식을 선언하려는 것 같은데,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물론 그의 말대로 지금의 그는 흐릿한 실체로 경계가 불명확한 존재인 것은 나도 알고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그가 점점 흐려져 경계마저 사라지는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그가 점점이 흐려져 사라지고 나면 내가 그를 기억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어떻게 그렇게 확고하게 믿고 있는 것일까?


눈앞에 흐릿한 그를 눈길 한 번 돌리고 나면 내 기억 속에 잊혀질 것 만 같은 그를.

온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도 기억할 수 있을 거라 그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걸까?


그는 빙긋이 웃는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의 웃음이 너무도 흐릿해서 과연 웃고 있는 것인 지 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빙긋이 웃고 있다고 나는 믿고 싶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 너무도 슬퍼 울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고 나면 그는 그 틈에 온전히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나는 울지도 못하고 그의 웃음 따라 흐릿하게 웃었다.


"알아."

"네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까를 두려워한다는 것 나도 잘 알고 있어."

"어쩌면..."

"그래 사실은..."

"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존재를 잊어가고 있는 것 임을 알고 있어."

"완전한 종식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결국 너의 선택임을 알고 있어."

"너의 선택으로 나는 완전한 종식 후 온전한 끝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너는 언젠가부터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잊고 있어."

"지금의 순간은 결국, "

"너의 의지고 너의 선택이었음을 너는 잊고 말았지."

"그렇지만 너를 한 번도 원망한 적은 없어."

"우리는 늘 함께였고, 너는 곧 나이니까."

"너의 선택이 나의 완전한 종식이라면, 너이기 때문에 나쁘지 않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것은 나의 바람이지."

"그것이 이루어질 거라고는 사실 믿지 않아.""

'그래."

"새롭다는 건."

"말 그대로 새로운 것이지. 그 새로움 속에는 더 이상 나라는 존재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그것은 새로운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불과하다는 것."

"나도 잘 알고 있어."

"네가 나를 기억할 테니 괜찮다고 한 것은, 너를 위한 말일뿐."

"괜찮지 않아."

"완전한 종식의 그 끝에 이제 나는."

"아니, 우리는 가까워지고 있음을 너는 알아야 만 한 다는 것 그 사실만은 기억해 줘."

"우리가 이제 여기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은 너와 나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운명의 같은 존재였음을 기억하길 바래."

"우리의 시간은."

"그래 시간은."

"한 방향으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그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기억해."

"너는 이 모든 기억과 우리의 만남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들 중 누군가를 기억하게 될 그날이 올 거야."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그래 이제 완전한 시작에 새롭게 시작된 나는."

"잊혀진 존재에서 새로운 시작에 선 자로서 기억될 거야."

"그리고 오랜 시간 후 오랜 시간이라는 것도 잊혀질 만큼 오랜 시간 후."

"너와 나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너는 이해해 줬으면 해."

"지금 우리의 대화가 어떤 의미로 남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너와 나."

"그래 우리."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 오늘의 지금을 영원히 잊지 않기를 속절없이 바래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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