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이곳과 비가 내리지 않는 그곳에서
어느 가을날 서울을 다녀온 구미역에서,
서울에서 부터 조금씩 내리던 가을비가 구미에도 이제 막 도착해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10시가 가까워지는 시각이라 사람들의 발걸음은 분주했고 비 냄새가 구미역 안을 떠다니고 있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비 흔적이 남겨지고 있는 역 안은 가을비로 젖어들고 있었다.
우산 사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비를 맞는 걸 싫어 하진 않지만 새로산 양복 새로산 구두에 대한 예의는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 틈에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을 곳에 비를 피한 노숙자들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한 노숙자가 내 시선을 잡았다.
그 역시 비를 피해 어느 기둥하나를 의지 삼아 앉아 있었다,
손에는 축 늘어진 샌드위치 조각을 들고 있었다.
그의 옷은 비에 젖어 무겁게 늘어져 있었고, 주변은 샌드위치 속 재료들이 삐져나와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무심히 지나쳤고, 나 역시 아무런 의식 없이 그의 옆을 지나쳐
비가 내리는 구미역 창밖을 바로 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역 앞을 바라보다, 무심히 다시 그 남자를 보게 되었다.
그는 그저 멍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술에 취한 듯 몽롱한 의식에 손에 쥔 샌드위치는 대조적으로 상큼한 냄새가 날 정도로 신선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한 입도 먹지 않았을 샌드위치는 흐느적 힘을 잃고 있었지만 휴지통을 뒤져 얻어낸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멍한 그의 눈빛은 샌드위치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 멀어 보였다.
깜박임도 없는 그의 눈은 텅빈 동굴처럼 보였다.
의식이 그의 몸을 떠나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듯 그는 미동도 없이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현실의 이곳이 아닌, 저 먼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의 눈을 다시금 보게 되었다.
그의 눈빛을 따라가며 문득 그가 바라보고 있던 그곳은, 지금의 이 현실과는 다른 어떤 곳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의식이 없는 텅빈 동굴 같은 그의 눈은 내가 보지 못한 무언 가를 보고 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더 이상 비도 내리지 않고, 굶주림과 추위도 없는, 그가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어딘가.
이 생각에 빠져들수록, 나는 그와 나 사이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짐을 느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나, 그가 바라보고 있는 저곳을 향해 마음이 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미쳐 보지 못하는 그렇지만 그는 보고 있는 그곳.
상큼한 냄새가 나는 맛있는 샌드위치를 손에 쥐고도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곳에 온통 마음이 뺏겨 있는 초월적 존재로서 거기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모두 현실 속에서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마음은 언제나 다른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그가 현실에서 놓쳐 버린 것들 혹은 잃어 버렸던 무언가를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 그는 찾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가 잃어버렸던 그 무언가가 무엇이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체 그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건 아닐까?
그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우울해졌다.
어쩌면, 그가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눈빛 속에는 내가 마주할 수 없는 나의 내면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 노숙자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마도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의 본질, 그 끝없는 추락을 바라보는 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손에 쥔 샌드위치이든, 내가 손에 쥔 값비싼 우산이든, 결국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붙잡고 있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곳이 아닌 저곳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우리는 말없이 걸어가고 있다.
나 역시 현실의 무게 속에서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와 같은 운명을 타고난 존재들일지 모른다. 현실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결국 그 남자의 눈빛처럼 허망하게 이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던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오히려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 남자의 무표정 속에 담긴 고통과 절망, 그리고 희미한 희망의 불빛이, 나를 다시금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어쩌면 그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그의 내면 속 마지막 불씨였을 을 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 불씨를 잃지 않기를 바랐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저곳을 향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우리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힘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구미역을 나서며 우산을 편다.
샌드위치에서 나던 상큼한 냄새는 비비린내에 가려지고 하늘을 가린 우산위로 비가 리듬을 만들어내며
타닥 투닥 소리를 낸다.
저 멀리 마음의 불씨가 타오르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밤은 길겠지만 끝은 있다.
새로산 양복과 신발이 어쩔 수 없이 비에 젖는다.
비는 스며들고 인생에 젖어드는 밤이 외롭지만 더 이상 쓸쓸하거나 서럽진 않다.
비오는 어느 가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