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였을까 그녀는 나보다 대여섯 걸음을 앞서 걷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 걷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순간 그녀가 나타나
내 앞을 걷고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체로 나는 어찌해야 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그럴수록 나와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그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체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그러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걸음은 멈칫 주춤 하며 망설여졌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거리는 그 만큼 멀어졌고 그 순간 그녀도 멈추었다.
확고한 의지가 담긴 그녀의 뒷모습 만큼이나 당당한 모습으로 뒤를 돌아다 본다.
분명 나를 향해 돌아서기는 했지만 그녀의 시선에 담긴 것이 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녀도 내가 자신의 뒤를 따라 걸어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꾸만 멈칫 거리는 나를 독려하기 위해서 뒤를 돌아다 본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확인 한 후 그녀는 다시 앞을 보고 확고한 의지가 담긴 뒷모습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돌아 본 순간이 흐릿했다.
분명 나를 향해 돌아다 본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내가 있는 것인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확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돌아선 그녀의 얼굴을 보았는데도 그 모습이 또렷하지 않았다.
익숙한 듯 그리운 듯 내가 알고 있을 그녀의 모습인데도
그것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흐릿 하기만 했다.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당당함과 의지 담긴 걸음은 그녀다 라고 느끼고 있었지만
내가 그녀다라고 느끼고 있는 그녀는 도대체 누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다는 걸 깨달을수록 마음이 텅빈것처럼 메아리도 없는 깊은 울림이 몸안에 울려 퍼졌다.
입안에서 맴도는 그녀의 이름을 만지작 거리며 기억을 더듬는다.
익숙한 이름이, 잊지 못 할 냄새가 기억의 저편 어딘가에서 스믈스믈 피어오르는 듯 도 한데
어느것 하나도 또렷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텅빈 메아리의 울림만이 매마른 소리를 내며 점점이 잦아들며 사라지려 한다.
멀어지는 그녀를 다시 따라 잡으려 나 역시 걷기 시작했다.
그제야 주변의 풍경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빛을 잃은 것처럼 엷은 회색빛의 도시에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텅빈 도시에 사람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도로와 가로수를 겸한 잎이 넓게 펴진 버즘나무도 잿빛이다.
모든 것이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처음 와 본 것 같지 않은 기심감은 뭐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
낯설지만 익숙하다는 것이 문장으로서는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나의 기분을 표현 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떠올릴 수가 없다.
밤인지 낮인지 시간도 측정할 수 없는 기묘함이었다.
기묘하다고 알아 차린 후 정말 모든게 기묘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도 이 거리도 모든 것이 이질적이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 그 자체가 가장 기묘한 점이었다.
그 순간 어쩜 이것은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꿈이라면 모든게 설명 될 기묘함이고 익숙함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자, 안심이 되었다.
주뼛 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르던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
이 상황이 꿈이라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내 기억 저 편 어디선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그녀를 따라가 손을 잡고 냄새를 맡으며
흐릿하기만 한 얼굴을 확인하고 만져 보면 될 것이었다.
그녀가 이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타박을 한다고 해서 나빠질 상황은 없다.
꿈이 깨고 나면 현실의 그녀는 전혀 알아 차리지 못 할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먼저 움직였다.
어쩔 수 없지 하는 기분으로 돌아서 그녀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색이 없는 재빛 거리에서 그녀만이 유일한 색감을 가진 존재였다.
유일한 존재로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그녀는 꿈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면서 그 비현실감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 손안에 땀이 흥건하게 젖어 드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앞서가던 그 천천히 그리고 확고한 의지의 걸음으로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다.
점점이 좁혀진 너와 나의 거리.
긴 머리카락이 바람도 없는 이곳에서 살랑 거리며 흔들리고 표정이 없는 눈빛은 나를 보는 것인지 나를 통과해 현실의 나를 찾으려 하는 것인지 깊은 눈길로 나를 본다.
드디어 내 앞에 마주한 그녀는 흥건히 젖은 나의 손을 잡는다.
매마른 그녀의 손은 내 손안에서 젖어든다.
그녀의 손이 젖어드는 것과 함께 그녀는 회색빛 거리의 모습처럼 물들어 간다.
아니 색을 잃어 간다.
흑배의 도시에 물드는 것처럼 옅어지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씩 더 흐릿해져 간다.
색이 바래가는 그녀는 도시의 잿빛에 물들어 경계가 모호한 흐릿함으로
사라지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
축축하게 젖은 손의 감촉만을 남긴체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난 나는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 있는 손안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감촉을 느낀다.
어둠은 짙어 사방이 캄캄한 동굴 같다.
그 어둠속 어딘가에서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뒷모습을 보인채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답답한 어둠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 앉는다.
밀도를 더해가는 어둠의 장막 뒤를 바라본다.
그녀가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이것은 꿈이었구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은 잠이 깬 지금에도 기억나지 않는다.
잊어버리고서 잊어버린지도 모르는 상실감에 슬퍼졌다.
손안에 남아있는 감촉만이 그녀가 거기 있었다는 증거처럼 선명하다.
언제가 다시 꿈을 꾸게 된다면 나에게 돌아와 어쩔 수 없지 하는 심정으로 그녀가 나의 손을 잡고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 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러나 꿈은 나의 꿈이지만 꿈에도 의지가 있는 것인지 다시는 그녀의 꿈을 꾸지 못했다.
회색빛 도시만이 저 꿈 어디가에서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하나둘 형체마저 허물어져 가다보면 텅빈 공간으로도 의미 없을 무의 공간으로 사라지지 않을까, 사라진 도시에서 유일한 색감을 가진 그녀는 어떻게 될까, 그녀의 이름도 그녀의 얼굴도 떠올리지 못 하는 나의 기억속에서 그녀도 잿빛 도시처럼 사라져 갈지도 모른다는 슬픔이 무슨 운명같은 예감으로 다가오는 밤이다.
어쩔수 없지...
저 어둠 끝자락에서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