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그 동굴 속이다.
언제가 와봤던, 아니 어쩌면 여러 번이었을 이 장소는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익숙하다. 하지만 왠지 이 곳을 낯설게 느껴야 될 것 같은 불편한 예감이 내 안에 스며든다. 그 이유는 나도 알 수 가 없다.
다만 그렇게 느껴야만,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이 분명히 정리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뿐이다.
일단 동굴을 빠져 나왔다.
햇빛이 스미는 밖의 풍경은 어딘지 생소했다. 마치 80년대 초반의 거리풍경을 연상시키는 촌스러운 간판들과 아직 정돈 되지 못한 골목길. 그리고 아무리 둘러봐도 높은 건물들은 보이지 않고 단층건물 들만이 빼곡한 거리. 그럼에도 이 곳은 제법 이 도시의 중심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거리에 사람들의 발걸음은 한산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하다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라고 했지만 나에게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
당연하게도 누군가와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상한 말이지만 누군가로 지칭되는 그(그녀)를 도무지 기억해 낼 수 없는데도 그(그녀)를 너무도 익숙하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나의 걸음은 알 수 없는 약속장소를 향해 명확하고 확고한 걸음으로 망설임도 없이 의지로 가득한 한걸음 한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를 만나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라고 느끼고 있다.
거리로 걸음을 옮기면서 내가 나왔던 동굴을 바라다 본다. 밖에서 바라보는 그곳은 도저히 동굴의 입구라고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전문가의 솜씨가 닿은 듯 완벽히 다듬어진 건축물의 입구였다.
박물관의 그것처럼 위엄 있고 웅장함까지 느껴지는 제법 세련된 건물이다.
그리고 이 도시의 유일한 고층 건물이기도 했다.
과연 내가 동굴에서 나오기나 한 것일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걸음을 옮기면서 이 거리가 어디일까 두리번 거린다.
어디선가 익숙한 흔적을 찾아 헤매지만, 모든것이 여전히 낮설기만 하다.
다시 이 장면이 반복 된다면 그때는 온전히 기억할 수 있게 찬찬히 거리의 풍경을 머리속에 집어 넣으려 집중했다.
그때 “어이~” 하며 부르는 친숙한 목소리가 있다.
나는 반갑게, 그리고 동시에 누굴까 라는 생각으로 그(그녀)를 뒤돌아 본다.
그 순간,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실루엣이 보였다.
그(그녀)의 눈빛은 나를 향해 깊게 고정되어 있었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없는 중대한 무언가가 공기 중에 흐르고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가올 운명적인 순간을 예감하며, 모든 것이 연결될 준비를 하고 있다.
일단은 거기까지다.
너무도 익숙한 그(그녀)를 나는 끝내 알아보지 못 했다.
어쩌면 나는 끝내 그(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채,
이 낯선 익숙함 속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스며든다.
기억은 희미한 안개의 장막 속에서 머뭇거리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멎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