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우림 Aug 06. 2024

열 살 언니, J_(1)

J님은 사회사업가 나와 근 열 살정도 차이 난다. 

정확히 계산하면 열한 살 '위', 한 집 식구라면 아주 큰 언니. 

그리고 나는 그런 언니 생각으로 몇주몇달을, 꽤나 힘들게 보내야 했다. 




J님과 제대로 만난 기간은 사실 그렇게 길지 않다. 

부서 옮기면서부터였다. 넉넉 잡아 서너 달 정도.

J님은 지적 약자이다. 읽고 쓰기? 어느 정도 가능, 간단한 숫자 계산?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말'을 하는 데는 큰 무리 없이, '꽤나 잘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같은 부서에서 동료의 말을 들어보니 J님의 '말문'이 트인 게 아주 최근이라 한다. 

여기에서 사실 1차 충격, '정말? 지금 말을 얼마나 잘하는데?'


J님의 매일매일을 아는 대로 설명하면 대충 이렇다. 

아침 아홉 시 전후, J님은 직원과 다름없이 복지관에 온다. 

몇몇 직원은 "J님과 함께 출근했다." 라며 웃곤 했다.

금요일과 주말을 제외하면 사일을 그렇게 한다. 

아침 모임하고 커피 한잔 마실 때 즈음, 

'이제 일을 좀 해볼까?' 하는 딱 그 타이밍에 J님도 '일과'를 시작한다.

먼저 사무실에 들러 이 사람, 저 사람, 이 직원, 저 직원에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라는 말 대신 예뻐졌네, 신난다, 누구는 어디 갔어? 

또는 뉴스거리를 실시간으로 전할 때도 있다. 

주로 어디에서 어떤 사고가 났고, 몇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등등.

J님의 관심 분야는 정치, 경제, 사회, 연예, 편식하지 않고 늘 골고루다. 

가끔은 J님의 말을 잘 따라가지 못해 몇 번을 되묻는데 잘 들어보면 다 맞는 말만 한다. 

또 아주 가끔은 이유를 물을 때도 있다. 때론 그 질문이 너무 '철학적인' 탓에 말문이 턱 막힐 때도 있다.

비가 왜 오냐, 그 사람은 왜 죽어야 했냐, 불쌍해라, 등등.

그럴 때면 "(잠시 정적)음. 네, 그렇네요. (다시 정적) 저도 궁금해요." 하며 어물쩍 넘어간다. 


J님의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을 씩 질문했고 오후 서너 시쯤, '퇴근' 후 집에 도착하고 나선 

우리 부서 직통 전화와 휴대전화로 계속 연락이 온다. 

그러고는 했던 말을 하고 또 한다.  

그 질문을 가만히 듣다 보면 '말문이 늦게 트인 게 맞긴 맞나 보다.' 하고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사십 년간 쌓아놓고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 그 얼마나 많았을까.


나는 그런 J님을 복지관 '인사 담당자'라고 농담 삼아 말을 하곤 했다.

예를 들어 J님은 입퇴사 직원에 대해 관심이 매우 많다.

퇴사하고 자리에 없는 직원을 몇날며칠, 몇 달을 찾았으며(이미 알고 있으면서 "누구 왜 안 보이냐?")

그런 중에 입사 직원에겐 또 살갑게 먼저 다가갔다.

남자직원에겐 "잘 생겼네." 여자직원에겐 "예뻐졌네." 

이 두 마디가 J님이 할 수 있는 최고 칭찬이며 관심 표현이다.

휴가, 교육, 회의, 외근 등등, 빈자리라도 보면 누구보다 빠른 질문으로 그 직원의 행방을 확인해야 한다. 

가만히 보면 아침 아홉 시부터 출근하듯 복지관에 오는 이유가 다 있는 것 같다. 

할 일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느지막이 오겠나.


그런 '인사 담당자' J님의 질문은 때론 나를 박장대소하게 만들기도 했다. 

우울할 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장면 가운데 하나.

J님과 만나 관계 맺고 한 두어 달 즈음되었을 무렵이다. 

그늘 아래 앉아 있을 만한, 적당히 따뜻한 날씨였던 늦봄 어느 날. 

나는 점심 먹고 남은 삼십 분간 광합성할 요량으로, 빠른 걸음으로 복지관 건물 계단을 내려갔다.

평소 같았으면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앉아 고독하게 글을 쓰고 있었을 텐데, 

그날 하늘과 바람과 볕은 지나가게 놔두기엔 너무 아까운 봄, 그 자체였다. 

아무튼 나는 그 시간을 아주 알뜰히 쓸 마음으로 커피 한 잔, 

책 한 권 을 들고 앉아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는데, J님이 다가와선 이렇게 한마디했다.


"일 안 하냐?"


하필이면 그때 자외선 변색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마치 썬 배드 같은데 기대앉아 모히또를 기울이며 책을 읽는, 선글라스 낀 얼굴이었기에, 

진짜 어느 휴양지에 머물며 '일 안 하고 있는' 모양이었기에, 

웃다 사레들려 컥컥 댈 만큼 박장대소하고 만 것이었다. 

아마 올해 들어 그렇게 크게 소리내어 웃은 것도 처음이지 않나, 싶다.

얼마나 웃기 던지. 

그날 시간과 장소와 옷 차림새 등등 하나같이 J님의 그 한마디를 위해 조합된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J님, 지금 쉬는 시간이에요, 쉬는 시간. 아직 분 남았어요." 


J님은 그 이후에도 두 어번 같은 말을 반복하다 이내 자리를 옮겼다. 

글을 쓰면서도 너무 웃겨 몇 번을 피식했다.




J님은 말문만큼이나 늦게 트인 게 많다. 

아니, 아직 '덜 트인'이라 하는 편이 조금 더 적절할 것 같다. 

몇 주 전, 갑자기 쏟아지던 폭우에 우산 꺼낼 틈도 없이, 그 비를 모두 맞고 온 J님.

그게 아침이었으니 앞으로 반나절은 젖은 몸을 하고 지내야 한다. 

그래서 머리라도 좀 말려봐요, 하며 옆 부서에서 드라이어를 찾아 J님 손에 쥐어 드렸는데

여기에서 2차 충격, 충격이라 하면 좀 그렇고. 놀람.


"드라이어 써 본 적 있지요? 자, 여기. 이 버튼을 위로 이렇게, 이렇게 하면 바람이 나오네요."


J님은 능숙하게 드라이어를 사용하는 듯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드라이어 주둥이 부분은 허공을 향해 있었으며 수건을 쥔 또 다른 손은 얼굴 언저리에서 방황했다.

쉽게 말해, 양손의 '협응'이 잘 되지 않는 모양. 

사실 J님은 몸을 씻고 옷과 신발을 입고 신고, 휴대전화로 번호를 찾아 연락하고

집 주변 길을 찾고, 사람을 알아보고 밥을 먹고, 먹은 자리를 정리하는 데에 있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지점에서 자꾸 멈칫하게 된다.

지적 약자임에도 잘하는 게 있고 조금 어려워하는 게 있다. 

사람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J님의 잘하고 어려워하는 그 지점은 늘 의외였다. 

예상보다 능숙하게 하는 일이 있는 반면, 

'J님 정도라면' 쉽게 할 수 있지,라고 판단했던 일을 전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작은 탄식을 내뱉곤 했다.

 



으레 판단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노래였다. 

나는 장애인 당사자와 지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여성장애인 중창단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J님은 올 3월 즈음부터 신규 단원으로 합류했다. 

어떻게 합류했나, 되짚어보니 '어떻게 하다 보니'였다. 

처음에는 참관으로 시작, 그런데 그 사이 담당자 퇴사, 새로운 담당자(나) 배치됐고 

정말 '어떻게 하다 보니' J님은 정식 단원으로 매주 한 번씩 빠짐없이 정기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매년 7월마다 우리 중창단은 '장애인합창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대회(예심)에 참가한다.

다른 팀은 예심에서 1등, 이후 전국 대회 우승, 같은 거창한 꿈을 안고 참가하는 반면, 

우리는 무대에 서는 경험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기쁘게, 즐겁게 하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대회는 대회이다. 예심 명단에 드는 순간부터 바짝 연습한다. 

지휘자, 반주자 지도 아래 소리를 잘 내는 법, 소리를 '예쁘게' 포개 놓는 법을 배워 익힌다. 

때문에 다른 때 보다 그 몇 개월은 꽤나 '스파르타' 식으로,

단원 사람, 사람의 소리를 더욱 유심히 듣고 합을 맞추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그날 지휘자 선생님은 J님을 보며 한마디 했다. 


"J님, 목소리를 좀 내볼까요?"


그간 J님은 제대로 소리를 낸 적이 없다 한다. 

몸만 좌우로 움직이는 정도였고, 가끔 소리를 내긴 하는데 

가사를 따라 '노래'하는 수준은 또 아니었기 때문에, '목소리 한번 들어봐야겠다.'하는 의도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한마디에서 '사건' 시작이다.




J님은 소리는 낼 줄 알았으나 노래는 아니었다.  

가사를 따라 읽는 것도 잘 되지 않았으며, 음의 높고 낮음에 대해, 소리의 크고 작음에 대해,

젖은 머리 주변에서 방황하던 드라이어처럼 들쑥날쑥, 왔다 갔다, 하며 

허공을 가로지르기만 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세 번째, 매우 충격을 받아 이번에는 '크게' 탄식했다.


다른 스무 명의 단원에게 있어 그 무대는 일 년에 한 번만 주어지는, 꽤나 중요한 자리였다. 

참가에 의의를 두는 정도라고 하겠지만, 그럼에도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작년보다 나은 모습을 위해,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당장 다음 달 초 대회에 나가야 한다. 

J님의 노래를 듣기 전만 해도 크게 어려울 게 없었다. 

그런데 J 님의 노래를 듣고 나선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노래를 못한다 해서 J님을 배제하고 대회에 나가는 게 과연 맞나?

그렇다고 함께 간다? 

J님 한 사람도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다른 스무 분의 단원 역시 나에게는 귀한 사람이다. 

이 스무 분이 그간 쌓아 올린 노력을, 애씀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당장 하자, 말자, 쉬이 말을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조금 쉽게 생각하자, J님의 '장애'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노래를 못해' 그런 거야.

노래를 못하는데 어떻게 대회에 나가겠어.

그런데 또 이곳은 '장애인' 복지관인데,

지난 사십 년 넘는 삶 가운데 수도 없이 많은 소외, 차별, 제외, 거절을 겪어왔을 J님에게 

'장애인' 복지관에서, '장애인'복지를 하는 사회사업가로서, 이게 할 '짓'인가?

J님이 만일 비장애인이었으면, 그 나이 즈음의 중년 여성이었으면,

학교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가족, 친구, 이웃과 편히 어울리고, 

어디에서, 어떻게 하든 노래하고 노래 듣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으면? 

J님의 장애와 '노래 못함' 사이 아무 연관이 없다 수 있어?

이를 단순히 '노래 못함'이라 할 수 있는 거야? 




남은 시간은 한 달, 지휘자 선생님과 몇 번 더 보기로 했다.

그 한번, 노래 몇 마디만으로는 판단할 순 없지 않나. 조금만 더 지켜보고 지도하고, 연습하자, 했다.

J님을 따로 만나 몇 번을 부탁했다. 


"J님, 노래할 때 소리를 조금만 낮춰 줄 수 있어요?"

"응." J님은 할 수 있다, 했다. 


하지만 지난 사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노래라는 걸 제대로 배워 불러본 적 없는 J님에게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 없다.

이삼 주 더 살펴보며 부탁하고 지도하고 연습했음에도 J님의 노래 실력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 정말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가 왔다.

지휘자 선생님도 '더는 어렵겠다' 판단했고 

담당자 나는 안타깝고 미안하고, '이게 맞나?' 싶었지만 

'양자택일'해야 하는 때가 왔음을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또다시 J님에게 거절, 거부의 말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 담당 사회복지사 나의 몫이었다.


미룰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미뤘다. 

그 사이라도 뭔가 달라지진 않을까? 하는 아주 얕은 가능성을, 차마 내려놓진 못했던 것 같다.

한참을 고민했다. 그탓에 나는 그 시간 내내 의기소침하게 보내야 했다. 

스스로 납득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사업가로서 그간 배우고 익힌 바와 나름대로 지켜왔던 신념과 또 지난 십 년간 쌓아올린 모든 실천, 

그 어느 지점에도 이런 결정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2편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