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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퍼센트 Oct 12. 2024

아슬아슬한 땀을 모르는 당신에게

부치지 못하는 편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 당신이에요. 쉬운 말 한마디가 웬일인지 더 거북해 당신에게 편지를 써 봐요. 

벗기를 즐기는 두 사람, 양팔 저울에 재 봐도 똑같이 소중한 당신과 엄마이야기예요. 

10년 남짓 같이 지내다 보니 장모와 사위도 체질까지 닮아가는 듯해요. 

여름철, 땀 많은 것까지도.

 당신은 퇴근하자마자 옷을 모두 벗고 팬티만 달랑 걸쳐요. 

다 자란 여고생 막내딸이 있어도 그 차림새로 태연하게 거실에 앉아있는 당신이니까. 

잠잘 때도 그대로 벗은 채 잠들고요. 

 나는 여름에도 옷을 갖춰 입어야 도리어 안심이 돼요. 아무리 삼복더위, 땡볕이라도. 

집안에서 속옷만 입는 게 나한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에요.

 팔순 넘은 엄마도 당신 못지않게 열이 많은 편, 한겨울에도 두툼한 내복대신 얄팍한 반팔 티셔츠를 입으시죠. 그런 엄마가 무더운 여름을 살아내려면 벗을 수밖에 없나 봐요.

두 사람이 똑같이 벗어젖히는 탓에  당황스러운 순간을 여름철마다 맞닥뜨려요.

 8월 중순 어느 아침, 엄마는 새벽 밭일을 마치고 들어오시고 나는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아이코, 땀이 물처럼 흘러내리는구먼”

흘깃 돌아보니 엄마의 바글바글 짧은 파마머리가 어쩌다 장대비를 홀딱 맞은 것처럼 땀방울로 축축하게 젖어있었어요. 

엄마는 허물 벗듯 차례차례 옷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화장실로 들어가셨어요.

곧이어 당신도 고추밭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활짝 열고 들어섰고요. 고단한 밭일에 붉게 달궈진 낯빛으로 말이에요. 나는 부엌일을 하면서, 당신을 얼핏 뒤돌아봤어요.

“빨리 씻고 싶은데 여기에서 씻을까?”

나는 엄마가 방금 들어간 거실 화장실을 나도 모르게 쳐다보면서 황급히 대답했어요.

“저긴 엄마가 계셔요”

 그 말을 하고 무심코 돌아서는데, 무슨 일인지 당신은 우리가 기거하는 위층으로 곧장 올라가지 않았어요. 오히려 안방 화장실 방향으로 길을 잡아 부리나케 걸어갔고요. 온몸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딱 한 걸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짐작할 수 있으니까. 더욱이 땀 때문에 얼마나 꿉꿉하면 그럴까 하면서 자연스레 부엌일에 빠졌어요.

 저만치 거실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려와도 아무 생각 없이 편안했지요. 맨발로 살며시 나타난 엄마는 웃통을 훌러덩 벗고 속바지만 겨우 걸친 차림새. 나는 식탁과 냉장고 사이를 바삐 오가던 손놀림을 일순 멈추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어요.

“엄마! 지금 사위가 안방 화장실에 들어갔어요. 얼른 옷 입으셔!.”

안달이 나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째질 듯 높아졌어요.

엄마는 내 말을 듣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혀를 길게 빼물면서 난처한 기색이셨어요. 어째 그날따라 입을 만한 게 도통 보이지 않는 것인지. 소매부리에 풀물 든 엄마의 핑크색 셔츠만 발아래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요. 엄마가 두리번거리며 옷을 찾아 허둥대는 모습을 보자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죠. 손에 땀이 차서 벗겨지지 않는 고무장갑을 쭉 잡아당겨 억지로 벗고 옷을 찾아드릴 참인데.

당신이 안방 화장실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기척이 먼발치에서 들려왔어요. 엄마와 둘이 동시에 그쪽으로 온통 시선이 쏠렸어요. 어쩔 줄 몰라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 역시 아득한 일이라서. 절박한 엄마가 마지못해 벗어놓은 셔츠를 다급히 집어 어깨 죽지를 넣는 데, 당신의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가 금방 부엌까지 들려왔어요.

“으흠, 아직도 땀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의 평온한 얼굴.

나는 재빨리 당신과 맞은편에 선 엄마의 옷차림을 한눈에 훑어보았어요. 앞 단추 두어 개가 잠긴 덕분에 엄마의 앞가슴을 가까스로 감춰 주었어요.

 나는 소리 없는 말을 담은 은근한 눈빛을 엄마에게 슬그머니 보냈어요. 엄마는 눈치 백 단, 금방 알아채고 등을 돌리셨어요. 나머지 셔츠 단추를 허겁지겁 채우는 손길이 풀 메는 호미질보다 다급해도 어쩔 수 없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은 그대로 총총 2층 계단을 향해 걸어갔어요. 엄마는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되돌아보셨어요. 손바닥을 쫙 펴서 가슴골을 살포시 누른 엄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막힌 둑이 허물어지듯 난데없이 웃음보가 터져 버렸어요.

그 웃음 끝에 엄마의 단추가 엉뚱 맞게 한 칸 건너 잠긴 것을 발견해 냈고요.

“으흐흐, 웬 쇼인지? 단추도 비뚤 해요.”

엄마도 그제야 가슴에 얹은 한 손을 가벼이 내려놓으며 나를 따라 해맑은 웃음을 지으셨어요.

“에 휴! 다시 생 땀이 줄줄 흐르는 것 같구먼.”

자글자글 잔주름이 가득한 엄마의 양 볼이 얼핏 열여섯 소녀처럼 발그레 물들어 보이는 것은 혼자만의 착각인지요.

 환하게 피어나는 웃음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는 부끄러움은 나만의 몫이겠지요.

날마다 보아도 언제나 처음처럼 반가운 얼굴, 당신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 몰라서 더 다행한 일도 가끔 있으니까. 아슬아슬한 순간이 어슷하게 비켜가네요. 비록 보이지 않는 진땀이 남몰래 흐르더라도.

한 여름에만 겪는 조금 민망하면서도 어이없는 해프닝이 있어요. 


말로 전할 수 없어 은밀한 웃음을 짓고 있는 당신의 아내가.  


                  

추신: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옷을 제대로 입고 지내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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