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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퍼센트 Nov 02. 2024

아찔한 동행

팔순 엄마와 함께


  책은 평생 곁에 두어도 감질나듯 목이 탄다. 나는 책을 보다가 홀리듯 정신을 놓는다. 단 한 문장만 읽어도 가슴속에서 소리 없는 비명소리가 마구 쏟아져 나오니까. 책에 빠지면 시간이 온 데 간 데 없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다. 그 덕분에 아슬아슬한 일도 겪는다. 

 얼마 전, 팔순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가던 날이었다. 엄마는 지하철을 타면 종종 멀미로 남모르는 고통에 시달리셨다. 언제 넣어 놓았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사탕 한 알이 언뜻 뇌리를 스쳤다. 가방 속으로 손을 쑤욱 넣어 더듬었다. 앙다문 안쪽 지퍼 속이 의심쩍었다. 손끝으로 슬쩍 눌러보니 ‘바스락’ 비닐 포장지가 아직 살아 제 목소리를 냈다. 겉에서 만져지는 동그란 몸체가 앙증맞았다. 냅다 지퍼를 밀어젖히고 사탕을 집어 꺼냈다. “묵은 사탕이라도 드릴까?” 엄마가 아무런 말이 없으니 긍정이겠지. 엄마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사탕을 엄마 손에 쥐여 줬다. 

 그새 멀미가 밀려든 탓에 엄마의 얼굴은 핏기 없이 싯누렇다. 앉자마자 울렁증이 시작된 것이리라. 엄마는 뜻밖의 사탕을 받아 들고, 입술을 슬쩍 위로 끌어당기며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 기운 없는 웃음사이로 자글자글한 잔주름이 평소보다 진하여 그늘이 깊어 보였다. 

 엄마는 찐득하게 눌어붙은 비닐 포장지를 통째로 입에 넣고, 깨물어 한껏 비틀어 열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어른 엄지손톱만 한 사탕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알사탕의 단물을 입으로 수혈하는 것이다. 달짝지근한 사탕의 힘에 한껏 기대어. 엄마는 외출할 생각에 아침밥도 허겁지겁 집어먹고 나온 참이었다. 여물지 못한 허한 뱃속을 한꺼번에 훌떡 뒤집어놓는 울렁증을 엄마는 이겨내려 애쓰는 것이다. “30분은 가야 하니 눈 좀 붙이셔.”그 말에 엄마가 살며시 머리를 벽에 기댔다. 오물오물 연신 단침을 삼키며.

 나는 그제야 가방 속에 챙겨 온 읽다만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책갈피를 한 손에 빼들고 곧바로 책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는 사이 글자 밖, 덜컹덜컹 지하철 레일 소리는 조용히 꽁무니를 감춰 버리는 것이다. 

  책에 머리를 박고 읽다가 마음을 사로잡는 글귀를 어쩌다 만나면 재빨리 잡아채야 한다. 손쉬운 대로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급하게 한 줄 글귀를 적어 놓으면 비로소 안심이다. 흘러가는 강물을 되돌릴 수 없듯이 한번 스쳐간 생각은 용쓰듯 애써 봐도 깜깜절벽이기 때문이다. 어쩜 그럴 수 있는지 한심하고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찰나의 순간, 번쩍 마음의 눈을 밝힌 글이건만 놓치고 나면 빈 종이처럼 공허할 뿐이니까 말이다. 

 문득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불안감이 솟구쳤다. 펼쳐놓은 책을 반으로 덮어 두고 벽면의 노선도를 더듬어 살폈다. 정류장에 멈춰 설 때마다 초록불이 켜지니 먼눈으로 남은 정류장을 쉬이 세어보는 것이다.  

 엄마는 사탕 한 알로 간신히 부대끼던 속을 잠깐 잠재운 모양이었다. 조용한 기색이 다행스러웠다. “얼마 안 남았어요.” 엄마 쪽으로 윗몸을 바짝 기울여 귀엣말을 건넸다. 달갑지 않은 멀미가 곧 사라질 것을 예고하듯이. 

 자칫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칠 까 마음 한 귀퉁이에서 조바심이 살짝 스쳤다. 잔  물결처럼 술렁대는 불안감을 한 페이지라도 더 읽으려는 옹골진 글 욕심이 가볍게 이겨냈다. 지하철에서 책 읽기는 수월하므로. 무더위를 단숨에 잊을 만큼 쾌적한 데다가 책을 마주하는 시간은 언제나 거부 못할 쏠쏠한 기쁨이기에.

  잠깐 책 속으로 나도 모르게 흠뻑 빠져 들어갔나 보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벽면의 노선도를 확인하는 찰나,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동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뿔싸! 내려야 할 정류장을 이미 도착해 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벌써 출입문까지 활짝 열려있는 상태인 것을 어쩌랴. ‘어서 내려! 지금이야.’ 어디선가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몇 초 후면 출입문은 자동으로 닫히고 말 것이다. 앉은 채 벼락을 맞은 듯 그대로 벌떡 자리에서 곧추 일어섰다. 미처 읽다만 책을 가방 속에 넣지도 못한 채.

“엄마! 지금 내리셔!” 다급하니 짧은 외마디 소리가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왔다. 

 엄마도 깜짝 놀랐는지 눈을 번쩍 뜨고, 늘어진 몸을 부리나케 일으켰다. 나는 다급하게 가방과 책을 양손에 들고서 출입문을 향해  돌진했다. 서너 발자국을 성큼 걸어 나가면서도 출입문이 금세 닫힐까 봐 조급해진 마음에 치켜든 목 언저리가 뻣뻣했다. 흘깃 뒤돌아보니 엄마도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여 바짝 내 뒤를 따랐다. 엄마가 문 밖으로 겨우 두어 걸음 떼자마자 출입문이 ‘쾅’ 요란하게 닫혀버렸다.

 엄마는 놀란 기색으로 앞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코, 조금만 늦장 부렸으면 못 내릴 판국이었구먼.” 실은 나도 놀라기는 매한가지, 엄마를 모시고 나서는 길에 골치 아픈 실수를 할 번 하였으니까 말이다. 

 외출하는 한 걸음이 두려운 엄마다. 혼자서는 길을 떠나지 못하는 답답한 처지인 것을 뻔히 안다. 이름 석자 겨우 쓰는, 반 까막눈 엄마의 길잡이가 되어서 번거로운 일을 만들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건만. 이런 일로 엄마의 가슴을 섬뜩하게 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그럼에도 대범한 척 의뭉스럽게 엄마 앞에서 큰소리를 쳐보는 것이다. “걱정 마셔. 잘 못되어도 내려서 반대방향에서 타면 되니까…….” 지하철에서 맥 놓고 있다가 한 정류장 정도 지나쳐 버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나처럼 책에 넋 나간 이도 있겠지만 대부분 핸드폰을 보다가 그런 실수를 하겠지. 하긴 이유를 따져 물을 필요도 없으리라.

 출구를 찾아 나섰다. 인공관절 수술한 무릎, 눈까지 침침한 엄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다가오면 저절로 긴장을 하나보다. 엄마는 보이지 않는 실에라도 단단히 묶인 듯 내 발자국에 도장을 찍듯이 그대로 잇따라 걷는 것이다.

여러 갈래 표시된 출구이정표 앞에서 엄마의 표정이 한순간에 눈에 띄게 환해졌다.

“아! 알것어, 여짝으로 올라가믄 되잖어.”

 엄마가 수년 전부터 다닌 병원, 셈할 필요 없이 익숙한 길이다. 지하철을 잡아타고 찾아오질 못할 뿐, 병원 근처에 도착하니 엄마의 눈에도 익숙한 풍경이리라. 반가운 기색이 역력할 정도로. 

 엄마에게 흔쾌히 길을 내주고 나는 느릿하게 엄마 뒤를 따라갔다. 엄마는 당찬 걸음으로 앞장서서 병원이 접한 출구 쪽으로 길을 잡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달갑지 않은 가파른 계단뿐이다. 엄마는 계단 갓길 반질한 스테인리스 손잡이를 부여잡고 남은 힘을 끌어 모아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드디어 기다리던 여정의 끝, 병원건물이 빤히 보였다. 건물 출입구로 들어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엄마와 함께 올라섰다. ‘딩동’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던 기계음이 오늘따라 유달리 반가웠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진료접수를 내쳐 마쳤다. 

  그사이 엄마는 대기실에 앉더니 내 가방을 베개 삼아 옆으로 몸을 세워 길게 누워버렸다. 그 모습이 안방처럼 편안해 보이는 건 무엇인가. 모처럼 대기환자가 한 명도 없으니 이런 호사로움을 잠깐 누려도 껄끄럽지 않겠지. 부스스 일어난 엄마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믹스커피 마시고 싶은 디…….” 하긴 알사탕하나로 간신히 잡아 둔 멀미일 테니. 나는 냉큼 노란 커피믹스를 집어 종이컵에 부었다. 엄마의 부실한 뱃속을 뜨거운 커피믹스가 눌러 잠재우길 바라며. 

 엄마는 입을 한데 모아 호호 불면서 처음처럼 믹스 커피 한잔을 아껴 마셨다. 잠시 후 간호사가 엄마의 이름을 부르자 엄마는 발딱 일어나 활기찬 모습으로 진료실에 들어섰다. 방금 마신 믹스커피의 놀라운 힘 인가보다. 언제 멀미로 고생했는지 모르게.

 엄마가 비운 자리, 책이 제 자리인양 들어찬다. 되돌아온 책과 나,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다. 책갈피를 어디에 끼워 두었는지 그림자도 없다. 허둥지둥 지하철에서 내리다 길바닥에 흘려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리송한 채 기억을 더듬어 글자를 이어 붙인다. 책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문턱이 없다. 책을 펼치면 어느새 글 속으로 스르르 온몸이 통째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나처럼 얼빠진 이들에게 보내는 사소한 조언: 길잡이로 나설 땐 한 발은 빼놓자. 정류장을 놓치는 진땀 나는 순간을 맞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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