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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강우 Aug 14. 2024

심강우 (시인 소설가)

2023년 2024년 아르코창작기금 시 부문 발표지원 선정작

20242024 아르코창작기금 시 부문 발표지원 선정작 (7편 아르코창작기금 시 부문 발표지원 선정작 (7편




2024년 아르코 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7편 


처마의 방식      


            

하늘이 허전할 때 문득 생각나는 존재다 처마는 

지은 지 너무 오래된 다닥다닥 어깨가 붙은 집들

언젠가 옆집 친구 여동생에게 들창문으로 쪽지를 건넬 때

볕이 드는 그 아이의 얼굴도 이쪽 그늘 반은 가져갔다 

사랑을 잃고나서 이유 없이 먼산을 볼 때마다    

머리 위에 처마를 드리우던 꽃들은 또 어땠나

피는 자세와 떨어지는 자세의 차이점에 대해     

낙화한 자리의 그늘이 실은 빛의 구간이라는 것    

 

서까래도 처마도 없는 풍경에 발맞춰 마음들도

그늘이 없는 관계를 선호하게 되었다   

고개를 들면 때없이 추락하는 표정도 애써 환하다 

에두르기를 좋아하는 낭만은 뒷주머니에 구겨진

모자챙이 되어 가끔 식탁을 닦곤 한다   

봤듯이 처마 또한 탈부착이 가능한 눈치가 되었다   

   

품고 있던 사표를 찢은 것도 처마 아래서였다

장대비쯤은 그리운 노랫가락으로 변주하는 함석 처마

내 가난을 오래 보듬어 준 애인처럼 정겨웠다  

거세게 쏟아지는 가시 돋친 말마저 꽃무늬 빗방울로  

기운 만큼의 깊이로 속정을 그려 보이던 처마 같은 사람  

내가 오늘 다 젖어 어느 허름한 처마 아래 선 까닭은

오래 전 내 발끝에 리듬을 맞추던 비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마와 이마를 맞대면 살가운 웃음이 생기는 것처럼 

계단을 올라오던 노숙자가 문득 허리를 구부릴 때   

계단에 닿을 듯한 이마 틈새로 보이는 풀잎 하나  

우린 언제든 펼칠 수 있는 처마를 가졌지만 귀찮아서

혹은 규격이 다르다고 한 발짝 비켜선다. 눈맞춤을 피하는 건

처마 아래에서 함께 비를 피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 밥 짓기       


         

  잘 고른다는 건 잘 버린다는 말이라는 거 

  계약직을 한 번이라도 해 보면 아는 사실입니다

  버려진 기분이 위안을 받는 건 게으름은 자동갱신이라는 거. 목구멍은 평생계약이라 위아래 입술이 뭘 먹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도장을 찍어요   

  

  오일장이 좋은 이유는 슈퍼와 달리 냄새가 뒷짐지고 다닌다는 겁니다. 부딪쳐도 찡그리기는커녕 오랜만에 만난 삼촌이 잠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걸 보듯 잠시 땅바닥을 차며 능청 떨어요. 호떡집과 파전집 주위를 얼쩡거리다 돌아가신 엄마를 닮은 촌부한테서 쌀 한 됫박을 샀습니다. 한쪽 다리를 저는 걸음은 쌀을 든 손으로 균형 맞춥니다. 방 한 칸이 절룩거리면 담장에 기댄 접시꽃이 얼른 손 내미는 풍경을 상상하며 걷다 사고를 치고 맙니다   

   

  포장지가 터져 쌀이 쏟아졌군요. 신중하게 골라 담았지만 이미 쌀은 그 쌀이 아니어서 구경하던 남자는 더러워졌다 하고 참견하던 여자는 흙 묻었다 하네요. 조합하면 흙 묻은 더러운 쌀입니다. 그러니까 액면 그대로는 흙은 더러운 것이고 쌀은 못 먹는 것이 되고 말아요. 세상에,    

 

  집에 오자마자 쌀을 씻습니다. 가볍게 뜬 웃음을 걷어 내면 심각한 이야기만 남습니다. 당신과 주고받은 말 중에도 쌀이라고 생각했던 흙알갱이가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말들을 잘 씻어 안쳤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뒤늦게 발견한 저 쌀벌레는 어떨까요. 허기를 파 먹는 바구미 몇 마리. 둘 사이에 형성된 습도는 벌레를 부르고 맙니다        


  다 된 밥을 풉니다. 혼자 살고부터, 기다림을 거리감으로 곱새기고부터 뜸을 들이지 않고 먹어요. 한 끼 식사도 밥솥과의 계약이라 믿고 남은 밥은 보온으로 처리합니다. 속이 설설 끓는 고비를 넘긴 뒤가 중요합니다. 적절한 온도 유지가 밥맛을 결정하지요. 이러쿵저러쿵 찧고 찧은 말과 같습니다. 뚜껑이 자주 열리면 관계가 꾸덕꾸덕해진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요 



서랍의 내력        


        

사용빈도가 높은 서랍은 쉽게 닫힌다  

규모가 큰 서랍은 모서리도 꺼리지 않는다 

자동으로 여닫히는 쇼핑센터는 하루 수백 번

콧대가 경사진 수납처에 불만사항을 의뢰한다

서비스의 광택을 강조하는 직원은      

의외로 우기雨期의 상담을 선호한다

건식의 약관은 습식의 버릇을 수납하기 쉽다

이따금 막무가내 흐름에 떠밀려간 

후줄근한 뒷덜미 덜그럭, 잡혀 나온다      


광장은 수납공간이 부족하다

한꺼번에 열린 서랍에서 쏟아져나온

들뜬 마음들이 종횡으로 열을 짓는다

신호에 맞춰 새로운 서랍에 담긴다 

안내하는 손잡이의 모양도 다르다 

한 가지 용도로 인솔하는 건 시간이다

같은 자리에서 뜨거웠던 말들이

어떤 시간의 구령에는 차갑게 식어 있다

호환되지 않는 말들로 손잡이가 빠진다

그런 이유로 함부로 서랍을 엎을 때

제 몫을 잃은 마음들 한통속이 된다 

갈피 잡을 수 없게 된다      


사용빈도가 높은 서랍은 쉽게 열린다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서랍이 있다

덜컥, 하고 왼쪽이 열릴 때 텅,

오른쪽이 열리는 헤무른 습관이 있다      


그 여자의 서랍은 자꾸만 헐거워졌다 

맨 처음 배식차가 굴러가면서 서랍이 열렸다 

모텔 침대시트가 끼였을 땐 삐걱 소리가 났다 

봉제 인형이 쌓이고 통조림이 쏟아지고

노래방 탬버린이 비명을 지를 즈음   

서랍의 도르래는 달아나고 없었다

어린 아들의 울음소리가 굴러다녔다 

그 여자가 납골당의 서랍으로 들어가고서야 

모든 서랍이 닫혔다 아니, 열렸다  

쇼핑센터가 서랍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해졌다  

롤러스케이트를 탄 아들이 신나게 

광장으로 달려가는 것도 문제없었다  

오직 여자에게만 열쇠가 있었다              


                                                                                                       

구두 수선  


             

이곳은 우주정거장이다 

정적에 놓인 비행체가 두 대

사각의 지붕에 빗물이 떨어지고

관제사는 항로를 수정한다

두 대의 비행체는 잠시 계류 중이다   

 

엔진이 꺼진 비행체는 너머가 없다 

두 비행체의 항로는 줄곧 엇갈렸다   

비행체1은 앞이 벌어졌다

비행체2는 뒤가 기울어졌다      


항적이 다르면 표정도 달라지는 것일까

떨어져 나간 꼬리날개의 표정은 안온하다

전방을 잃은 비행사의 입에선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때 굵은 빗줄기가 우주정거장을 난타한다 


유리창 너머로 비행체들이 속도를 줄인다 

닫힌 정거장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서

바깥은 우주가 맞을까, 비로소 두 비행사는 마주본다

     

비행체1은 톱니 같은 화염을 감추고 있다 

맞은편 비행체2는 평화로운 지평선을 내장했다      

   

지평선 너머로 화염이 넘어가는 풍경의 당사자들이다     

 

비행체1이 먼저 떠나고 비행체2는  

새로 장착한 꽁무니를 흔들어 본다  

문이 열리고 빗소리가 온 사방에 가득할 때

몇 개의 풍경을 젖히고 나아가던 비행사는 

문득 속도를 멈추고 뒤돌아본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아늑한 정거장이 거기 있다

수선도 적선도 아닌 그저 지나온 항로를 점선으로 그려본 시간   

    

출발은 멈춤에서 시작된다     


좌초한 수많은 이륙을 착륙장으로 쓰라고 우주정거장이 있다 

앞서간 수많은 멈춤을 이륙장으로 쓰라고 우주선이 있다      


                                                                                                                         

실패 외      


           

  실패엔 실이 감겨 있고 실 뭉치엔 바늘이 꽂혀 있습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당신의 말 어딘가에 숨어 있는 실마리를 찾다 지친 나는 대충 꽂아도 좋을 빈틈을 흘깃거리다 말고 


  오늘도 당신은 한 시절 지나온 칠흑 같은 길을 풀어냅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하마스의 전쟁 

  당신에게 그것들은 국자에 딸린 간장종지와 같습니다. 슬쩍 찍어 맛본 당신의 전쟁은 짜디짠 냄새로 이쪽 실패에 감깁니다. 다소 버거운 맛이지만 휴일 오후를 공그르고 감치는 덴 손색없어서 이번엔 내 실패에 감긴 이야기들을 싱겁게 건넵니다        


  건설 현장이며 대리기사며 폐업이며 밀린 월세 따위

  내 실패에서 실마리를 찾아 홀쳐맨 당신은 내 실패와 당신의 보푸라기 핀 실패를 견주어 보는데    

  

  욕심이 많았죠?    

 

  끊어진 실오라기 같은 내 말마디에 당신은 손주의 실패보다 두툼한 당신의 실패에 꽂힌 바늘을 태연하게 어루만집니다     


  실패가 크면 바늘 간수하기가 수월하니라   


  문창살을 두드리는 바람소리에 나와 당신의 귀가 느런히 꿰일 때

  나는 비로소 내 실패의 가닥을 건져 올려 입술로 적십니다. 손끝으로 뼈를 다집니다. 바늘귀를 통과하려면 무엇보다 실마리가 분명해야 한다는 실패의  원칙에 충실합니다  



자동공정   


             

  로봇이 사람을 상자로 인식해 압착했다는 뉴스를 들은 뒤부터 Y의 노파심은 진화하여 톱이 되었다. 형식의 잉여를 썰었다. 잉어 대가리를 썰 듯이   

   

  자네도 이제 승진할 때가,

  과장의 혀가 싹둑 썰려 최대리의 접시에 담겼다

  과장님 실적이 부서원들 일년치 수주납품액보다 많은 것 같, 

  최대리의 눈치가 큼지막하게 썰려 Y의 수저받침이 되었다     


  로봇 행동패턴의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팀답게 그런 자리에서 오가는 말들에도 호환성이 중시되었다  

  프레스로 찍어내는 방식의 한계야

  과장은 제조기계의 결함에 대해 말했다

  상자의 표준모델이 미비한 데서 온 불가항력이죠

  수주업체의 안일함을 잇댄 최대리가 건배를 제의했다  

  이례적인 더위라는 뉴스가 방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셋은 약속이나 한 듯 윗도리를 벗었다. 옷걸이의 정규적 사용패턴은 비정규직 Y의 소관이었다   

  

  상자여서 유감이에요

  옷걸이 가까이에 앉으며 Y가 말했다

  옷걸이에 걸리고 싶을 때가 있었을 거예요. 옷걸이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Y가 덧붙였을 때 과장과 최대리가 동시에 트림을 했다

  Y는 자주 기침을 했다. 자연스레 말이 끊겨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과장과 최대리는 자주 Y의 술잔을 확인했다     


  술잔은 막무가내로 돌았다 컨베이어벨트처럼 

  Y는 집에 오자마자 변기에 대고 토했다. 지독한 술냄새, 납작해진 사람 하나가 변기에 떠 있었다. 쪼그라든 입에 물방울을 머금고 있었다. 형식을 증명하려는 안간힘 같았다     


   

연기자들     


            

우리는 연극이 좋아 만났지요     


집들이에서 진과 류가 말했다 

과장된 박수가 터져나왔다   

뒤늦게 참석한 신입사원의 

동작이 가장 컸다    

  

연극을 그만 둔 이유는

미래를 잃을까봐서라는 진의 대답에

아니, 사랑이라고 류가 수정하자

술잔이 올림픽 성화처럼 치켜들렸다    

  

마루에 미끄러진 기억을 가진 건 

그날의 우리가 아니잖아    

 

진과 류는 가장 좋았을 때의

기억을 끌어모아 화단을 만들었다     


밖에서 상처를 입을 때마다

그만큼의 꽃을 심곤 했다

낮아진 기억을 돋우며  

울다 웃다 했다      


말수가 줄어들수록  

화단이 풍성해지고     


진은 오전에 퇴근하고

류는 오전에 출근한다   

  

가끔 만나면 

잎사귀에 윤기를 더하는 법과 

생장점의 촉진에 대한 

비결을 공유했다     


앞질러 승진한 까마득한 후배가 

페이스북에 만발한 꽃을 보이며 

요란하게 웃던 날     


진은 물뿌리개를 내려놓았다 

류는 휴대폰을 바꾸러 나갔다  

   

우리는 연기를 하다 만났지요     


말해 놓고도  

류와 진은 차이점을 모른다   

  

연출가는 알 테지만

가을이 오기도 전에

다 지고 없다                

 



2023년 아르코 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7편



압력을 벗어난 밥솥

 

  

압력을 벗어난 압력밥솥이 수거함에 실렸다

압력은 활개를 편 가지보다 뿌리와 가까운 사이 

굳이 바위를 파고든 뿌리를 옮기지 않는 이유이다 

밥솥의 추처럼 그의 반생 역시 핑핑 돌았다

얕은 지층에서 그의 뿌리는 뜸을 들일 여유가 없었다 

가난은 언제나 그에게 설익은 생각을 재촉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건 그였지만

그를 씻어 안치는 건 보이지 않는 시류時流였다

불순한 생각을 조물조물 헹구는 동안 

밥솥은 백미와 잡곡을 가리지 않는다 

거친 생계를 불리는 시간이 다를 뿐 

묵은 습관이든 갓 찧은 가치관이든 

밥맛만 좋으면 된다는 원칙주의자이다 

한때 그는 급속취사를 선호한 적이 있다

꼬들꼬들해진 감정을 한 줄 말아 출장을 다녔다

보온에서 금방 덜어 낸 감정에 비해 눈치가 무디다는

심지어 싸늘히 굳었다는 평가에도 

그는 밥솥의 압력을 견딜 이유가 없었다 

 

실은 그가 겪은 세계가 모두 밥솥의 규격이었다 

회사에서도 은행에서도 주민센터에서도 식당에서도

심지어 모든 걸 부려 놓고 들어간 사우나에서도 

마음놓고 설설 끓어 본 적이 없었다

 

비로소 압력을 소진한 압력밥솥을 배웅하며

그는 먼저 간 아내의 이름을 불러 본다

출가한 자식들 얼굴도 가만히 떠올려 본다

이태 전에 퇴직한 회사 상호를 마지막으로 그는 

더 이상 풀 것도 없는 속내에 주걱을 놓고 돌아선다 

 



초록의 가계(家系)

 

 

집 또한 손길이 필요한 몸이라고 들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척추뼈가 허술해졌다

때 없는 웃음도 곡절 없는 울음도

혹은 자세를 유지하는 근육이거나 힘줄이었음을

골다공증이 자양분의 손실에 있다면

바람이 드나드는 빈집의 방들은

목이 쉰 성대인 셈이다

슬며시 낮잠을 청하는 들짐승들이나

숫제 한 세거지(世居地)를 장만한 명아주에게도

쪽마루가 들려줄 이야기는 마냥 고루해서

오늘은 슬하의 길고양이가 하품으로 대독한다

 

이야기는 고양이 수염처럼 짧지만

하긴 별과 별 사이의 거리도 한 눈금이다

함석지붕은 지상의 일을 눌러쓴 모자처럼 보인다

붉게 녹이 슨 모자의 챙을 만지작거리던 집주인 사내

진도가 안 나가는 식솔을 거느리고 도시로 떠난 뒤

세간을 대체한 건 먼지의 필기도구들이다

여백의 몸은 총총 별들의 책상이 되었다

 

새 주소 기입란에 닭벼슬꽃을 이식할 순 없지

마음이 가닿지 않는 우편 행낭이 아득할 때

집은 그때부터 자신의 몸을 우체통으로 이용했다

부쳐도 가닿지 않는 서신이 쌓인다

붉은 인주가 묻어나는 처마를

저 박새, 아까부터 자꾸만 쪼아대는 게

아무래도 모자마저 벗기려는 심산이다

 

어쩌면 내용증명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번번이 반송되는 녹가루의 마음은 

봉투를 잃어버린 바짝 여윈 초록의 가계(家系)는


 


허공

 

 

허공으로 허공을 그릴 수 없고 지울 수도 없다 

검은지빠귀가 날개를 편 모습만으로는 활공인지 착륙인지 알 수 없다 

허공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무엇이든 허물 수 있다 

허공은 나태하여 소멸을 불러오지만 공허를 채근하여 

전에 없던 생명을 조립하기도 한다 

허공을 배경으로만 다루는 건 허공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이다 

허공은 빈 창고가 아니라 둥글게 쌓여 가는 돌무더기에 가깝다 

더러 돌 틈에서 뱀이 기어나오거나 나비가 날아오를 때 

그때 비로소 누군가는 희망을 타전하거나 세기말의 자화상을 그려본다 

허공이 품은 것은 은하의 별만큼이나 많아서 

우리가 가진 것은 실은 허공이 본연의 모습을 잠시 잃을 때이다 

허공이 정신을 차릴 때야말로 가장 가난할 때이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을 한 줌 허공과 바꾸었을 때 

그때 허공은 자신이 떼 준 살점의 수천수만 배를 청구한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 

무너지는 것에는 더 많은 허공이 필요하고 

어떤 것들은 메워질 수 없는 부피를 얻는다는 걸 

허공은 제 몸을 허물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이 한 곳을 향해 파도처럼 걸어가는 것도

꽃대궁처럼 좁은 골목에 포개어 넘어지는 것도 

막무가내로 허공을 허무는 것이다 

부피가 사라진 곳을 메우는 건 허공이지만 

허공을 메우는 건 부피가 일정하지 않은 마음이라서 

허공이 유일하게 몸을 바꾸지 않는 건 

호환할 수 없는 그리움이나 진공의 슬픔 따위 

사람들의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캄캄한 속이다 

천지간 제일 부자인 허공이 가장 가난하다고 느낄 때이다 

 

  


흔적

 

 

범죄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고 프로파일러는 강조했다. 툰드라지대에서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죠. 조상의 계보를 말하는 인류학자의 찌푸린 미간도 퇴적된 흔적이고 꽃의 흔적은 열매로, 열매의 흔적은 새순으로 발현된다는 식물학자의 말도 어쩌면 흔적이 진화한 언어로 기록될 것이다. 

 

개의 목줄은 지나치게 짧아서 쇠말뚝은 완고한 항성으로 보였다. 예정된 궤도를 자주 이탈한 행성의 흔적은 바닥에 고인 침으로 증명되었다. 

 

궤도를 수정할 생각이 없는 그 집 주인에게 여전히 개는 충실하고 나는 회사에 매여 있는 목줄의 반경을 계산하느라 개를 구하려는 시도는 완벽한 개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개가 도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궤도가 흔들린 건 사실이지만 나를 비끄러맨 구심력을 벗어난 마음들은 불타는 성간먼지가 되어 꼬리를 남겼다. 

개가 긁은 양철대문을 기억하는 개망초의 유전자에는 발톱을 닮은 신경세포가 전승될지도 모른다. 저마다 생장점과 개화 시기가 달라서 우린 언제나 변명할 씨앗을 예비한다. 

넥타이가 갑갑할 때면 개가 생각났는데 꼬리를 흔드는 개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흔드는 말뚝을 떠올린다. 그늘의 범위가 나무의 뜻과는 무관한 것처럼 꼬리를 흔드는 습성을 고치려면 내가 벌린 가지를 과감히 잘라야 한다. 결국 개의 흔적은 나였다. 

  

 

 

 

다소 늙은 안식이려니 했다 

당신이 앉거나 고양이가 잠들 때도

어쩌다 지친 새가 머물 때도 

풍경만 바뀐 동행인 줄 알았다

 

의자가 이름이 되기 위해 

의자가 될 뻔한 수많은 이름들 

나는 이름 속에 묻힌 익명의 제보자 

내 몸의 기슭에 파도가 치다가

급기야 내 정강이뼈를 물어뜯을 즈음

비로소 바다의 배후가 궁금했다 

바다도 제 바닥을 모르는 눈치였다 

 

바다가 실어나른 수많은 의자

구름처럼 떠다니는 평화

격랑에 휩싸이는 의혹

혹은 바다를 굽어보며 바다를 

지배한다고 건들거리는 착각 

 

수명이 다한 의자가 무너진다

그때 젊은 안식은 부푼 내일에 

엉덩이를 걸치고 새 의자의 방향을 바꾼다

파도가 데려가는 이생의 자국을 바라본다

 

의자는 가고 

내 몸은 가뭇없이 잠긴다 

내 이력은 모래에 합산된다 

바다가 된 것만 생각했다 

바다는 모래를 뺀 무게라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단추 

 

 

송곳니를 윗단추로 쓰는 사자는 완고한 재단사임에 틀림없다. 물소는 조여드는 오늘을 벗어버리고 싶다. 치수를 재는 앞발과 거부하는 뒷발이 가위표로 재단된다. 쌀자루나 풍선처럼 어떤 것들은 한사코 채우면 터지는 법이다. 늘 목을 내놓고 다니기 버릇해 온 물소가 단추를 풀기 위해 용을 쓰느라 눈 속의 실핏줄이 터져 뇌우雷雨가 쏟아질 기세다. 

 

들판 가득 수놓인 색색의 꽃들이나 산중의 아름드리나무, 망망대해 곳곳에 박힌 섬들 또한 하나하나 채워 풍경을 여민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깨 짚어 시침질하는 속 깊은 궁량. 하늘이 겉옷이라면 숲은 어긋난 바람을 단속하는 방한조끼쯤 되려나. 아무리 어두워도 새들은 길을 잃지 않는다. 나무를 나누어 채우는 저 수많은 단추들은 이유없이 흔들리는 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차라리 지퍼처럼 단순하면 어떨까. 사자는 단추를 끝까지 채우려 들겠지만 물소는 마지막 남은 단추를 채움으로 새끼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빗물에 반지하방 문이 잠긴 것, 거기 사는 일가족이 수장된 건 억지로 채워진 것이다. 치수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과 같다. 이곳에도 노회한 재단사가 많다. 마치 열렬한 사랑처럼 물소를 부둥켜안는 자세를 곧잘 흉내내곤 한다. 

 

떨어져 나간 단추와 같은 단추가 없어 다른 단추들마저 버려진다.

버려진 단추들은 그때 비로소 눈을 뜬다. 실밥을 부둥켜안고 운다. 

 

   


 각성 

 

 

돌아보지 않는 시절의 이름을 부르는 중이라고

스스로를 한물간 소리꾼이라고 선언한 어머니

갈 날을 받아 놓곤 뒤를 앞이라 우긴다 

하늘을 향했다고 잎이 하늘로 가더냐고

봄이 와야 봄인 줄 알았던 나까지 돌려세운다

나는 늙는 것을 미루고 당신의 말년을 북채 잡는다

 

꽃의 박수엔 과장이 없다고

때 없이 당신은 건너편 객석을 가리킨다

추임새는 산의 호흡을 각성하는 거라 이른다

산을 이쪽으로 당겨 앉자는 게 아니라 한다

잦아드는 아니리에 객석의 추임새는 한결 푸른데

 

그게 아니라고 말 못하는 나는 산이 되다 만 사람

나무도 되지 못하고 풀도 벌레도 돌멩이도 되지 못하고

구름 같은 허랑한 관객임을 자처했던 사람 

 

악보가 된 산 층계마다 빼곡한 청중

머리와 발끝이 한 음표로 그려진 색색의 소리들이

떼창을 하는 오늘은 언젠가 돌아볼 당신의 마지막 공연

언제나 한 가지 색으로만 울렸던

울리기만 하여서 가슴이 시퍼런 나는

공명심에서 마음 하나 뗐을 뿐인데 공명(共鳴)한다고,

 

북채를 바로잡아 주며 소리꾼은 헐겁게 웃고

예약하러 온 북망산 일몰은 슬며시 의자를 밀어 넣고

다시 건너편 객석으로 가 앉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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