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해룡 Jul 19. 2024

77K

#건물주와의 첫 만남

범석은 후배형사가 보내준 문자의 주소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다. 마을버스가 지나는 골목 옆으로 좁게 나있는 샛길 초입에 세 명의 중년 남녀가 두리번거리며 서 있다가, 범석이 차에서 내리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본인을 실종자 김유선 씨가 살고 있는 건물의 소유주라고 소개한 남자가 악수를 청했고, 뒤이어 실종자의 부모들과도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걱정으로 얼굴이 잿빛이 되어 발을 동동 구르는 실종자의 어머니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두어 발짝 떨어져 먼 하늘을 보며 짜증 섞인 담배연기를 뱉어내고 있었다. 며칠 연락이 안 된 딸을 실종신고까지 하며 호들갑을 떠는 와이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이 깊게 파여 있었다.
범석은 바로 왼쪽으로 보이는 3층짜리 건물로 건물주를 따라 걸어갔다. 건물주는 곧장 공동현관의 왼쪽 문을 밀어 열고 들어갔다.
"공동현관이 왜 그냥 열립니까? 고장이 난 건가요?"
건물주 바로 뒤로 붙어서 따라가던 범석이 건물주에게 물었고, 실종자 어머니는 "어머머!"라고 나지막이 외치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범석과 건물주 표정을 번갈아 살폈다.
"아 참 이게 또 열려있네. 304호에 사는 젊은 남자가 배달기사 일을 하는 거 같던데, 전에 보니까 그 젊은 남자가 이 현관문을 열어놓고 그냥 가더라고. 내 화가 나서 전화로 한마디 했지!"
범석은 공동현관의 비밀번호 커버를 올려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숫자버튼의 왼쪽에 세로로 숫자 네 자리가 작고 희미하게 적혀있었다. 아마도 자주 배달을 오던 기사들의 시간 단축을 위한 의기투합이리라. 그렇다고 그들만을 탓할 수는 없다. 공동현관 도어록의 본래 목적인 '안전'은 성질 급한 고객들의 식욕과 물욕에 밀려 이제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되었고, 다수의 안일함에 불안해하던 소수의 사회적 약자들마저 반복되는 무탈함에 속아 불감증이 뿌리내려 자리 잡았던 것이다.
망각의 수심은 덧없이 깊고, 가라앉은 기민함은 웬만한 물결로는 다시 수면 위로 쉽게 떠오르지 못한다.
범석은 도어록 커버를 내리며 건물주에게 물었다.
"여기 얼마나 자주 오십니까?"
"못해도 3일에 한 번은 옵니다. 아시는지 몰라도 건물관리가 보통일이 아니에요. 이 손 가는데 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니까!"
건물주의 말을 들은 범석은 그들의 의기투합에는 분명 건물주의 서명도 들어 있음을 직감했다.
그들은 공동현관 바로 안쪽 오른편 계단으로 반 계층을 내려와 102호 앞에 섰다. 건물주가 요즘은 공무원이나 다룰법한 열쇠꾸러미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돋보기안경 밑으로 가져가 열쇠마다 붙은 낡은 번호들을 확인했고, '102'라고 적힌 열쇠를 집어 현관문 손잡이에 넣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데 말이야. 요즘 성인이 집을 좀 비웠기로서니 그걸 실종이라고 할 수 있나요? 여행을 갔다던가 가출 뭐 그런 거 일 수도 있지 않나? 원래  102호 아가씨는 문자로 월세 얘기를 할 때도 답장을 며칠이 지나고 할 때도 있었다고요. 도 뭐 아가씨가 일이 바빠서 그랬겠거니 했."
건물주는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돌려 실종자 부모님들에게 슬쩍 목례를 하며 겸연쩍게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시선을 가져와 열쇠를 왼쪽으로 돌렸다. 범석은 그저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그래, 당신은 역시 집 값이 떨어질까 하는 걱정뿐이네. 건물주다워.'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네, 사장님. 잘 알고 있고요 저희도 절차상 방문하는 거니까 크게......"
문을 열어 한 발짝 내딛고 들어가려던 범석은 방 안쪽의 장면에 왠지 모를 미심쩍음을 느꼈고, 왼팔을 들어 올려 뒤 따라 들어오려던 사람들을 막아섰다.
천장 센서 등 빛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바닥에는 손바닥 크기의 빨간 종이 상자가 있고, 그 상자를 중심으로 네 방향에 조그마한 큐브조각이 놓여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히 이상했고, 누군가가 본인 의도에 따라 정확한 간격으로 배치했음이 틀림없어 보였다. 범석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두 세장 찍고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어 플래시를 켜고 각도를 바꿔가며 사진을 두 세장 더 찍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건물주가 말했다.
"저게 뭐지? 택밴가?"
"요즘 택배는 집 안까지 배달해 준답니까?"
범석은 이렇게 말하며 사람들을 뒤로 물러서게 한 뒤 후배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수사지원과 과학수사 요청을 부탁했다. 그는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 상황에 대한 어떤 강한 확신 같은 것이 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실종자의 부모와 건물주에게 절대 방 안으로 들어가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자신의 차로 가서 니트릴 장갑과 신발 덮개를 챙겨 다시 실종자의 원룸 현관으로 돌아왔다. 장갑과 신발 덮개를 하나씩 꼼꼼하게 착용하며 범석은 본인 조치의 타당성을 납득하려 계속해서 자문했다.
'사건현장으로 보는 게 맞다. 내 직감이 맞을 거야. 이건 확실히 누군가가 [특정소수]에게 노출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장치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면 어떡하나. 실종자의 남자친구가 준비한 이벤트라거나, 아니면 실종자가 출근할 때 하던 독특한 루틴이라거나, 혹은 그녀의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신앙에서 비롯된 의식 같은 것이라면?'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비집고 나오는 잡념에서 벗어나려 눈을 질끈 감은 범석은 결국 '내 착오라면, 그래서 아무 일 없다면 뭐 오히려  다행인 것이다!'라고 생각을 정리한 뒤 그녀의 방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