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아의 말이 끝이 났는데도 나는 잠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믿어지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단편소설 분량은 될 법한 장황한 내용을 한 번의 막힘도 없이 술술 내뱉는 선아의 언변술과, 차갑도록 흔들림 없이 확신에 찬 눈빛까지. 나는 선아가 방금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믿고 싶은 마음이 들정도로 그 이야기에 아니, 화자인 선아 그녀에게 매료되어 버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당혹스러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연신 표정에 신경을 쓰면서 천천히, 아주 조심스레 선아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니 말은...... 최근 뉴스에 보도된 6건의 자살사건이 모두 자살로 위장된 살인...... 연쇄살인이라는 얘기야? 그것도 WCI라는 국제기업의 짓이라고 그게?"
"맞아. 나도 지금은 아는 게 거기까지야."
선아는 침착했고, 양쪽 볼이 살짝 상기된 것 외에는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다.
나는 대화를 자연스레 이어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너에게 전해 들은 건 현재 나 밖에 없다는 거고?"
"응 그렇지. 나도 대인관계가 막 넓진 않으니까. 그래서 너를 찾아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
"그래. 나도 그게 궁금했어. 15년이나 연락 한번 없던 너가 갑작스럽게 찾아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음모론이라니...... 그리고, "
긴장을 한 탓인지 목이 말랐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필 나를 찾아와서 하는 이유도 난 잘 모르겠고. 나에게 접근한 방식도 마음에 안 들어. 의뢰인인 것처럼 속여서 약속을 잡다니."
"윤지야, 그건 정말 미안해. 내가 다시 한번 사과할게. 다들 너가 워낙 바쁘다고 그래서...... 빨리 전해야 되는 이야기라 그랬어. 정말이야."
그렇게 말한 뒤 선아는 고개를 숙인 채로 손톱을 만지작 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는 조금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떨어지게 된 지는 오래됐지만 말이야...... 윤지야. 나는 네 생각 많이 했어. 기억나? 우리...... 보육원에서 늘 붙어 다니던 단짝이었잖아."
"......"
그래. 그랬었다. 단짝.
15년 전 선아와 나는 새싹 보육원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썼고 또 같은 침대에서 생활했다. 키가 작고 날렵한 선아가 침대의 위층을, 체격이 더 큰 내가 아래층을 썼다. 어릴 적부터 키가 컸던 나는 늘 침대에 기대어 서서 선아와 함께 셀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주제로 수다를 떨곤 했었다. 우린 아침에 눈을 뜬 후 새벽에 잠이 들 때까지 항상 함께였고, 그것이 우리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었어서 마치 하나의 육체에 깃든 두 개의 개별화된 인격 같았다.
하지만, 선아는 어느 날 불현듯 보육원을 떠났다. 입양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단짝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 지 3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이별, 상실의 아픔. 그땐 너무 어린 마음에 아무런 잘못 없는 선아를 미워하고 원망했었다.
나는 기억을 잠시 밀어 두고 현실로 돌아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성의 없이 대꾸했다.
"아, 그랬었나?"
"응. 난 그 피해자 6명 중에 니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엄청 기뻤지만, 앞으로 네가 그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겁이 나서 서둘러 너를 찾았던 거야. 그 6건의 사건 피해자들이 모두 새싹 보육원 출신이라는 게 아무래도 그냥 우연은 아닌 거 같아 혼자 너무 무서웠거든."
불안한 듯 촉촉이 젖은 선아의 눈동자를 보다가 문득 기억 속 깊은 곳의 귀퉁이에서 그와 같은 슬픈 눈을 가진 한 아이가 떠올랐다. 입양으로 보육원을 떠나는 차 안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선아의 눈이었다. 희뿌연 기억 속 선아는 그때 무어라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 말이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오래된 기억의 단점은 그 기억을 떠올리는 현재의 감정상태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 변질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선아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고, 어떤 모습을 매일 떠올렸던 걸까.
커피잔이 벌써 식어 버렸다. 나는 커피잔을 테이블 한쪽으로 치워놓고 잔이 있던 곳을 괜스레 냅킨으로 닦으며 말했다.
"내가 위험한 거면 사실 너도 위험하다는 거 아냐?"
"그래서 나는 요즘 내 등록된 주소지 말고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어. 다니던 일도 관두게 됐고. 나 어릴 때부터 겁 많았잖아."
"그래, 그건 기억날 것도 같네."
문득 선아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을지 궁금해졌다. 작고 여리기만 했던, 들에 핀 꽃 같던 선아. 15년 전, 네가 입양되며 우리가 헤어지게 되었을 때, 그때 너도 나를 원망했을까. 너의 외로움은 무슨 색깔이었을까. 우린 이별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면서도 같은 통증으로 아파하며 살아왔겠지.
마음속에서 선아와 나, 우리 둘에 대한 연민이 어렴풋이 솟아올랐다.
나는 테이블 위로 두 손을 올려 선아 쪽으로 뻗으며 웃어 보였다.
"야 단짝, 우리 둘 다 성인 돼서 다시 만났으니 낮술 한잔 하러 가는 거 어때? 15년 치 할 이야기도 많고, 안 그래?"
선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두 손을 내 손 위에다 포개어 올렸다. 그러고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내밀며 속삭이듯 말했다.
"좋아!"
선아는 빙긋하고 수줍게 따라 웃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가방을 챙기고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오던 선아가 갑자기 내게 팔짱을 꼈다. 보육원 시절 단짝이었던 우리는 늘 이렇게 팔짱을 끼고 다녔었다. 가슴이 살짝 뛰었다. 그 찰나에 내가 놀라서 움찔했던 걸 선아가 눈치채지 않았기를 바라며 나는 카페 문을 힘차게 열었고, 우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번화가 거리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사이코패스 새끼는 이 날 선아 뒤를 밟고 따라와 카페에서부터 계속해서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