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덕질하는 인생
미국에서 고등학교 4년을 마치고 사립 대학교에서 또 4년을 보낸다면 학비, 기숙사비, 생활비 등등을 합쳐 적어도 8억 이상의 돈을 부모님이 나에게 썼을 것이다. 내가 사회에 나가 일을 시작하는 즉시 연복이 1억이라고 해도 나는 8억을 다시 회수할 수 있을 때까지 8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리 아빠는 나에게 투자한 비용과 투자할 비용에 비해서 내 꿈이 너무 작다고 말한다.
어린애들의 장래희망 직업은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보통은 항상 바뀌기 마련이다. 그리고 많은 경험이 없어서 희망 직업이 매우 단순하고 우리가 모두 예상할 수 있다. 어릴 때 내 꿈도 항상 바뀌었다:
유치원생일 때는 단순히 '부자가 되어 집사 있는 집에서 살기, '
초등학교 때는 미술 선생님, 일러스트,
그다음에는 슈가 크래프트,
나중에는 친구들 따라서 CEO,
얼마 전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지금은...
성공한 덕후
초등학교 여느 어린아이들처럼 애니메이션 보는 것을 즐겼다. 처음으로 가장 진하게 덕질한 애니메이션은 '프리즘스톤'인 것 같다. 프리즘스톤은 피겨 스케이트, 패션 코디, 노래를 결합한 아이돌들의 퍼포먼스와 일상을 다루는 일본 원작 애니메이션이다. 매일 ost를 듣고 만화에 나오는 옷들을 그리고, 비싼 돈을 들여 굿즈를 사기도 했다. 아직도 크리스마스 때 트리 아래 놓여 있던 프리즘스톤 트렁크를 잊을 수 없다. 초등학교 4-5학년까지 매년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받았는데 유일하게 기억나는 선물이다. 동생들도 물들여 항상 나와 같이 프리즘스톤을 보고 우리는 프리즘스톤 때문에 피겨 스케이팅까지 배웠다. 애니메이션에서 보이는 것에 비해 막상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았고 금방 실증을 느꼈다. 지금은 더 오랫동안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지 않은 게 후회된다.
중학교 때는 이누야샤에 빠졌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시간을 초월한 마음' 노래를 알게 되었고 노래가 너무 좋아서 몇 달간 계속 이 노래만 듣다가 Watcha에 가입해 이누야샤를 보기 시작했다. 아는 게 없어서 가장 위에 뜨는 이누야샤 극장판을 처음 보았는데 계속 봐도 내가 아는 '시간을 초월한 마음' 멜로디가 안 나와서 의야했다. 조금 뒤에 알게 된 후 이누야샤 1기 1화부터 제대로 보았다. 이누야샤, 셋쇼마루, 금강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지금 이 그림은 다 어디에 있을까...
이누야샤를 시작으로 나는 종말의 세라프, 아오하라이드, 암살교실,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등등 여러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봤다. 암살 교실은 가장 눈물 많이 흘린 애니메이션이다.
귀멸의 칼날도 많이 좋아했다. 만화방에서 책도 다 읽고 한참 '무한열차' 영화가 상영중일 때 홍대에 위치한 유포터블 카페에서 렌고쿠가 열차 안에서 먹었던 도시락도 먹었다. 당연히 굿즈도 많이 사고 귀멸의 칼날을 포함한 여러 애니메이션 만화책을 모으기도 했다.
https://www.ufotable.com/koreacafe/
나는 2년 전부터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정식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바이올린을 연주한 건 7살 때였지만 유치원에서 잠깐 배운 거고 학원을 따로 다닌 적도 없다. 그때 당시에는 왜 배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팔을 계속 올리고 있는 게 너무 힘들어 울기도 했다. 그러고 중학교 때 또 잠깐 바이올린을 학교에서만 연주했다. 유튜브에서 애니메이션 ost를 너무 많이 들어 슬슬 질리기 시작하면 ost violin cover를 많이 듣는다. 나도 유튜브에 나오는 저 사람들처럼 애니메이션 ost를 악기로 연주라고 싶어 고등학생이 되고 정식적으로 레슨도 받으면서 바이올린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하니까 너무 재밌다. 재미가 들리니 열심히 연습해 Regional Orchestra에 합격되기도 했다. 현재는 State Orchestra에 합격하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어려운 테크닉을 연습하고 중간중간 주술회전 '역몽'을 연주하는 소소한 행복이 항상 있다.
꿈은 수도 없이 많이 바뀐다. 위에서 나열한 내 과거 꿈들도 내가 희망하던 것들의 일부일 뿐이다. 나에게 꿈은 오늘 정했어도 내일 바꾸고 싶은 것이다. 내 꿈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명확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는 덕질을 내 인생의 꿈으로 잡았다. 위에서 지금 나는 '성덕'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슨 분야에서 성덕이 되고 싶은지는 답하지 못한다. 확실한 건 내가 미술, 디자인, 애니메이션, 노래, 덕질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뿐이다.
2년 뒤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년 반 뒤에 대학교에 원서를 넣는다. 어떤 전공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 예전에는 내가 워낙 미술에 관심이 많으니 미국 디자인 학교를 알아보았지만 결국 아빠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나에게 공대를 추천했다. 아빠가 말한 이유들이 절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평생 취미로 해도 되고 직업이 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하신다. 아빠는 내게 더 큰 꿈을 가지라고 조언하셨다.
나는 지금 공대를 가기 위한 과외활동을 하고 있다. 코딩을 방학 때 강의로 배우고 있고, 어려운 수학 과목을 수강하고, 몇 달 뒤에는 교수님과 리서치를 시작한다. 계속 그래왔듯 미래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 바뀔 것이고 지금 하고 있는 공부들은 나중에 나한테 다 쓸모 있는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가장 흥미를 느끼고 진심을 다할 수 있는 덕질에 대한 마음은 오랫동안 바뀌지 않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큰 꿈을 꼭 꿔야 할까라는 생각이 요즘에 계속 든다. 딱히 문제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에게는 아직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명문 사립 대학교를 가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없다.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나중에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학벌 때문에 발목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뿐이다. 중간중간 시간이 남을 때 애니메이션을 보고 목욕할 때 ost를 크게 틀어놓는 소소한 덕질을 하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만을 위해 고등학교 삶을 설계하려고 한 여유 없는 과거의 나에 비해 더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