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구
봄꽃이 지천에 흐드러지던 1961년 5월 어느 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1학년 수업시간. 교수는 김동리. 학생은 박상륭, 조세희, 한승원, 강호무, 김원일, 양문길, 이문구, 하현식, 장효문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미래의 작가들.
이날 강의 제목은 '이문구의 습작에 대하여'였다. 시작하자 마자 학생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조세희가 먼저 입을 뗐다.
"사건의 줄거리도 없는 게 무슨 소설인가"
한승원이 말했다.
"소설의 '소'자도 모르는 초보들도 이보다는 잘 쓸 것이야. "
이건청도 거들었다.
"말이 필요 없다. 우선 재미가 없잖아. 문장 늘어지는 것 좀 봐. 하하"
훗날, 절친이 될 박상륭이 카운트 펀치를 날렸다.
"주인공이 왜 자살을 한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김동리의 총평.
"나는 이 학생이 앞으로 우리 문단에 독특한 스타일리스트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제2의 염상섭이라고나 할까. 아니 김유정이라고 하는 게 오히려 더 가깝겠군. 하여튼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소설가가 될 것입니다."
김동리의 호평에 학생들은 울쌍이 되었다. 정작 이문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은 김동리교수가 이문구만 감싸고돈다며 입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1학기말 시험시간. 김동리가 칠판에 적은 시험문제를 본 학생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문구의 습작에 대해 논하라'
김동리의 눈은 정확했다. 대학시절이 이미 문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학생들 속에서 스스로 '노가다 문장'이라고 자신을 비하했던 이문구를 재목으로 점찍으며 이토록 격려했던 김동리 덕분에 우리 문단에 독특한 스타일리스트 한 명을 보유하게 됐으니 말이다.
이문구는 1941년 충남 보령 관촌부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가족사는 기구했다. 큰형은 일제 징용으로 목숨을 잃었고, 아버지는 6.25 전쟁 때 남로당 보령군 위원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둘째 형과 비명횡사했으며 셋째 형은 빨갱이 자식이란 이유로 대천바다에 산 채로 수장됐다고 한다. '빨갱이 집안, 빨갱이 자식' 이러한 멍에가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비슷한 배경을 가진 다른 몇몇 문인과 달리 문학적으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다. 내가 이문구를 한없이 존경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속마음이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누구에게나 이념과 관계없이 공평하게 대했다.
문단에선 아버지와 같은 스승이었던 김동리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지만 한국문학 편집장으로서 무엇보다 역사와 사회를 보는 냉철한 시각은 물론 문학과 문인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그는 갖고 있었다. 보수논객으로 일관된 신념을 보여준 스승 김동리와 70년대 진보적 문학진영을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제자 이문구. 스승이 눈감을 때까지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던 것은 이문구의 타고난 어진 성품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문구 선생을 딱 한번 만났다. 회사 뒤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이란 표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인간 그 자체였다. 근사하고 멋진 붓글씨로 사인을 하고 낙관까지 찍은 책을 선물로 주셨다. 건강 때문인지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 "술을 얼마나 마셨냐"라고 물으니 "문청 시절엔 1년 내내 마셨다"며 하루에 서너 개의 술자리가 이어졌지만, 한 번도 마다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내가 평소에 이문구 선생에 대해 궁금했던 게 하나 있었다. 문체였다. 한참 독서에 빠져 있던 시절, 문학과 지성사 초판 '관촌수필'을 읽는데 6일이 걸렸다. 길어야 이틀이면 끝냈어야 했지만,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만연체의 독특한 문장은 그의 서라벌예대 동기인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명료하고 간단한 문체와는 정 반대여서 읽는데 발목을 잡았다. 한참 늘어지다가도 갑자기 급박해지고 그러다가 다시 평탄해지는 서술방식. 여기에 그가 충청도 토착어에 집착하는 것도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런 식이다.
'나는 여태껏 그 대복어매처럼 수다스럽고 간사스러우며,걀근걀근 남 비위를 잘 맞추고 아첨 잘하는 여자를 본 일이 별반 없는 줄 안다. 그녀는 별쭝맞게도 눈치가 빨라 무슨 일이건 사내 볼 쥐어지르게 빤드름했고 귀뚜라미 알 듯 잘도 씨월거리곤 했는데,남 좋은 일에는 개미허리로 웃어주고 ,이웃의 안된 일엔 눈물도 싸게 먼저 울어댔으며...키도 나지리한 졸토뱅이로서,입재며 발재며 손바르고' ('관촌수필'연작 중 '녹수청산'에서)
당시 김동리 말대로 한국학사에 누구도 넘보지 못할 작가로 남았고 '관촌수필'이라는 길이 남을 명작을 남겼지만, 과연 후대들이 그의 글을 찾아 읽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아프다. 이는 이문구에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젊은 세대들이 김승옥 최인호 이문열 황석영 등등 작가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멀마나 찾아 읽을지 회의감마저 든다. 책 제목때문에 어느 서점에선 수필집 코너에 꽂혀 있었다니 그저 웃어 넘길 일만은 아닌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