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
송창식이 하도 '선운사 동백꽃을 본 적이 있냐'고 노래하기에 찾아간 선운사는 정말 아름다웠다. 동백꽃망울이 터질 듯할 때라 그 장관은 보지 못했지만, 대웅전을 병풍처럼 싸고 있는 동백나무만으로도 눈이 부셨다. 아쉬운 발길을 돌릴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미당 서정주 문학관' 이정표였다. 바로 지척이었다. 그래 맞다! 여기가 질마재였구나. 냉큼 차를 몰았다. 잔뜩 흐린 하늘 탓인지 학교를 개조한 문학관은 을씨년스러웠다. 그 풍경이 너무도 서러워서 버려진 느낌마저 들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시인을 이렇게 방치하다니. 마음이 울컥했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당장 한국 최고의 시인을 한 명 꼽으라면 나는 단연 미당 서정주다. 아주 오래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끔 그의 시를 찾아 읽는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미당전집 초판본은 물론, 문학동네에서 재출간한 미당 전집도 소유하고 있다.
미당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오직 시만 가지고 논할 때 그의 이름 앞에는 ‘시성(詩聖)’ ‘시의 정부(政府)’라는 찬사가 따라붙지만, 친일·친독재 전력에 이르면 그의 이름은 '다쓰시로 시즈오'가 되고 전두환 칭송 시인으로 폄하된다. 두 얼굴을 가진 시인. 그래서 문학사에 점점 잊혀가는 시인. 그럼에도 한국어를 한단계 승화 시킨 시인.
유명한 시인 누구는 아주 오래전 술자리에서 나와 보들레르를 두고 한창 논쟁을 벌일 때, "우리에겐 미당이 있지 않은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당이 말하면 그게 바로 시"라고 극찬했다. 나는 그 주장을 감동적으로 들었고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랬던 그가 훗날 미당을 가리켜 '독재를 찬양한 친일 쓰레기'라고 외쳤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이런 혹독한 비판에 미당은 처절하게 무너졌고 그 이름 석자는 사라졌다. 대신 백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백석의 시를 부정하진 않지만, 그의 시가 '정지용을 뛰어넘는가'라는 생각에 미치면, 나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당연히 백석은 미당도 뛰어넘지 못한다. 그냥 내 생각이다.
여기 한 편의 시가 있다. ‘동천(冬天)’이다. ‘내 마음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한국 시사에서 가장 빼어난 시 중 하나다. 나는 동양화 한 점 같은 그 시의 풍경을 목도한 적이 있다.
열 살 전후. 큰아버지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칼날 같은 바람이 살을 베는 매우 추운 날이었다. 들판엔 눈이 쌓여 있고, 겨울 하늘에 초승달이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그 풍경이 지금껏 내 기억 속에 선연한데, '동천'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짧은 시가 그때 내가 보고 느낀 그 상황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한자도 넣을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시어로 말이다.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동천'이 한국어 로 쓴 가장 완벽한 시라고 생각한다. 이성복의 '남해금산'보다 열발걸음 앞서 있다.
고등학교 때 늘 빈손으로 들어오는 국어선생님은 '국화옆에서'를 가지고 장장 한 시간 동안 열변을 토했다.
"서정주가 아니면 절대로 쓸 수 없는 시다. 서정주는 두보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동천'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했다. 대충 이랬다. "일체의 설명적 요소를 배제하고 고도의 압축과 상징으로 이루어진 시다. 상징이라는 표현 기법을 통해 강렬한 언어 긴장을 이루며 인간 본질의 탐구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정제된 미의식이 돋보인다.역시 미당이다.’ 미당은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그런 미당이 지금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
미당은 첫 시집(1941년) ‘화사집’에서 관능이 꿈틀대는 탐미주의적 세계를 보여주었고, ‘귀촉도’(48년), ‘동천’(68년)에서는 영원성의 형이상학적 미학을 파고들었다. 75년 ‘질마재 신화’에서 그의 시는 절정을 이룬다. 질펀한 해학이 돋보이는 산문체 시편들로 고향 고창의 마을 곳곳에 서린 옛이야기 들을 걸쭉하게 풀어냈다.
하지만 그의 전력은 이제 고향사람들에게 조차 버림받은 시인으로 만들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퇴출된 것은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던 '국화옆에서' 시비가 하나 둘씩 철거됐다. 시비가 사라질 때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며 환호했다. 꼭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러다 보니 다시 그를 불러내는 것도 어려워졌다. 한번 버리기는 쉬워도 버린걸 다시 거둬들이는 것은 천배 만배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외람되지만, 특히 전라도는 미당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꽃의 시인' 김춘수는 “미당의 시로 그의 처신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미당의 처신으로 그의 시를 폄하할 수도 없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다”라는 말로 그의 시가 처한 현실에 안타까움을 토로했지만, 이런 상반된 평가는 그의 시 '화사(花蛇)'의 한 구절처럼 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그렇다 해도 미당을 뱀 보듯하는 세태가 너무 슬프지 않은가. 비극의 역사가 만들어낸 또 다른 비극이다.
내년이면 미당 탄생 110주년이 된다. 사망한 지도 벌써 24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는 전력으로 한국 최고의 시인을 기리는 움직임은 조심스럽다. 도대체 ‘을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그의 운명은 이리도 가혹한가. 이제 봉인(封印)을 열어 그를 꺼내줄 때도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