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생활 형편이 녹록지 않았던 우리 집이 1권 '그리스신화'로 시작해 50권 '한국 현대 동화집'까지의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 들여놓은 날, 비가 내렸다. 우산을 받쳐 들고 나무장까지 있는 고급스러운 전집을 들고 오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시내버스 요금은 10원, 자장면은 한 그릇에 50원. 그런데 문학전집은 권당 440원이었다. 한 질에 무려 22000원으로 소시민 가정이 들여놓기에는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그날 아버지의 표정이 썩 즐거워 보이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고민 끝에 이 전집을 구입해야 했던 부모님은 자식들이 많았던 다른 집처럼, 우리 역시 3명의 자식들이 이 책을 모두 읽을 경우 본전은 뽑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특히 만화가게를 전전하는 나를 독서의 세계로 삐지게 하고 싶었던 간절한 소망도 함께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이근철 권웅 박기정 김성래 엄희자가 지배하는 만화가게에서 좀처럼 탈출하지 못했다. 특히 그때는 만화를 보면 주인 도장이 찍힌 쪽지를 하나씩 주었는데, 그 저녁 TV 시청권의 유혹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문학전집을 아예 외면한 건 아니다. 49권 '한국전래동화집' 50권 '한국현대동화집'과 '톰소여 모험기'십오소년 표류기'는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그 외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심오한 외국문학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50권 중 10권만이라도 한국 어린이 동화나 소설에 할애했다면 독서에 더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아동문학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고, 상당수 아동문학가가 동화나 소설보다는 동시에 치중했던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한다. 한마디로 콘텐츠 부족.
독서에 관심을 가진 건 그로부터 몇 년 후 연회비를 내면 자유롭게 책을 빌려 볼 수 있는 사설 도서관 덕분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는 누님이 시간이 없다며 3개월 남은 이용권을 내게 넘겨줬다. 그걸 들고 찾아간 스무 평 남짓 허름한 도서관은 별천지였다. 없는 책이 없었다. 주인은 대뜸 김내성의 '쌍무지개 뜨는 언덕'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게 운명이었다. 너무 재밌었다. 나는 그 책을 밤새도록 읽으며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다. 그날 이후 3개월 동안 매일 사설도서관을 갔다. 그 후 소설가 박범신이 '쌍무지개 뜨는 언덕'덕분에 소설가가 됐다고 술회한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나 혼자 배시시 웃었다. 나와 싱크로율 100%. 훗날 박범신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 얘기를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한동안 잊고 있던 아동문학에 대한 관심을 다시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이오덕선생 때문이었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시와 산문을 모아 '일하는 아이들'과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를 출간했는데 이게 큰 충격이었다.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를 읽으며 그 조짐을 눈치챘지만, 막상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을 보니 이건 '아동문학의 혁명'이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 어린이들은 '신데렐라'류의 서구 이야기나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을 쫒는 동화책을 읽어야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오덕 선생 덕분에 농촌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천하에 드러났다. 아이들에게 달콤한 꿈과 희망만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 아동문학은 이오덕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오덕 이후 어린이 동화와 소년소설에 리얼리즘이 등장한 것은 눈여겨볼 일이다.
그런 면에서 권정생의 '몽실언니'는 현실성 있는 아동 작품을 고대해 왔던 이오덕 선생의 기대에 부합하는 보석 같은 존재다. 이 책의 놀라운 흡인력은 당시 40만 권을 넘었다는 엄청난 판매고에서 입증된다. 최근 책을 다시 읽고 36부작 드라마도 봤다. 시큰둥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감동은 여전했다. 몽실이 삶이 어땠는지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드라마도 세련되지 않아서 오히려 꾸밈없는 '날 것' 그대로였다. 배우들의 실수 장면이 여럿 있었는데 그게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권정생도 몽실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모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밑바닥 생활을 했고, 글에 등장하는 북촌댁과 몽실 동생 난남이처럼 결핵으로 평생 고생했다. 권정생은 삶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나마 위안을 주는 건 오직 '글쓰기'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글을 통해서라도 권선징악, 고진감래 같은 허황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권정생은 시종일관 어린 몽실을 옥죄는 다양한 형태의 고난에 대해 지나치게 냉정하다. 몽실이를 평생 절둑거리는 불구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꼽추와 결혼시키는 것만 봐도 그렇다. 꼭 그렇게 까지 했어야 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권정생에 대한 눈물겨운 미담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안동 일직면 조탑리에서 지냈고 작품인세와 남은 재산은 유언대로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으로 탄생해 사회에 환원했다. 한국문학사상 자신의 모든 걸 내놓은 이런 작가는 없었다.'몽실언니'를 다시 읽고 그 어느 때보다 유난히 권정생이 그리운 것은, 내가 점점 천박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국 아동문학에 '리얼리즘'을 불어넣어 혁명을 가져 온 이오덕 선생과 권정생.
권정생의 흰 고무신이 슬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