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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낙타 Nov 25. 2024

평생 소리만 찾아 다닌 귀명창

판소리연구가 이보형

 



 나는 '인연'을 믿는다. 그 '인연'에 '운명'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다. 내가 정 붙이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판소리를 만나 지금까지 남다른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도 그와의 '인연'덕분이다. 1980년 대한민국 최초로 KBS  93.1 메가헤르츠가 클래식전문방송으로 탄생했다. 서양클래식으로 가득 찬 편성표에 용케도, 기적처럼, 오후 5시부터 6시까지 한 시간이 우리 전통 음악에 할애됐다. 30분은 종묘제례악 같은 전통국악, 그리고 30분은 '판소리 순례'. 그 판소리를 만난 게 내겐 운명 같은 '인연'이었다. 그때 그 방송을 진행한 분이 판소리연구가 이보형선생이었다. 그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서양 클래식에만 넋이 나가 있었을 것이다.


  '귀명창'까진 아니더라도 소리에 관심을 갖게 해준 이보형 선생이 세상의 무관심속에서 지난 13일 세상을 떠났다.


 나는 오늘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선, 우리나라 언론의 부고관련 기사다. 우리나라엔 부고 전문기자가 없다. 아마도 세계 경제대국 10위 국가 중 부고 담당기자가 없는 나라는 우리기 유일할 것이다. 정치인이 죽으면 정치부 기자가, 문화인이 죽으면 문화부 기자가 부고를 쓴다. 유명하면 좀 더 길게 써주고 유명하지 않으면 부고란에 이름만 넣어준다. 그런데 '유명함'의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엿장수 맘대로다.


 선진국 언론에서 부고담당기자를 제일로 치는 것은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이 죽었다. 나이는 상관없다. 데스크가 취재지시를 내린다. 취재해서 200자 원고지 20장으로 써가지고 와라. 유명인이라면 큰 부담을 갖지 않을 것이다. 쓸 얘기도 많을 테니까.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떠난 0살이라면. 기자는 고민에 빠질 것이다. 10개월이라는 그 슬픈 공간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퍼즐을 맞추듯 그 공간을 찾다 보면 그의 부모를, 그 부모의 부모를 찾아가면 쓸거리가 나온다. 그렇게 부고기사가 완성된다. 고뇌하고 준비 많이 해서 쓰는 부고기자의 그 노력을 미국 언론은 높게 친다. 부고기사에 감명을 받는 것은 정말 흔한 일이다.


 '뉴욕타임스 부고모음집'이 얼마 전 출간됐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참 좋았다. 죽은 이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못하면 쓸 수 없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답고 심오한 문장이 부고기사를 가득 채웠다. 아니 넘쳐났다. 70년 아니 100년 전 부고기사를 지금 읽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것도 그래서 일것이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여 부고기사를 썼다는 얘기다. '심쿵'한 부고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다.  이 718페이지 벽돌책을 나는 웃으면서 읽고, 읽은 후 울었다.


 가령, 트로츠키 부고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26시간 동안 생사의 갈림길에서 끈질기게 사투를 벌인 레온트로츠키가 결국 오늘 ( 1940년 8월 21일) 저녁 7시 25분 60세 나이로 사망했다. 어제 그의 자택에 침입한 자객이 곡괭이로 그의 머리를 가격하면서 생긴 부상 때문이었다. 트로츠키가 그의 비서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동지들에게 가서 제4인터내셔널의 승리를 확신한다고 전해주게. 전진하라고!" '  


  팝스타 데이비드 보위의 부고 기사다.

'한순간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고 늘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후배 뮤지션들에게 드라마, 이미지, 그리고 페르소나의 강력함을 몸소 보여준, 시대를 훌쩍 앞섰던 싱어송 라이터 데이비드 보위가 지난 일요일 세상을 떠났다. 사망하기 이틀 전은 그의 69번째 생일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의 부고도 뉴욕타임스에 '특보'로 실렸다.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오늘 이곳 호놀룰루에서 별세 헸다. 향년 90세. 하와이로 망명한 후 건강이 악화되어 병상에 누운 지 3년 하고 4개월이 지나던 참이었다. 뇌졸중은 결국 마우날라니 요양원에 입원 중이던 '한국호랑이'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고향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이보형선생은 전설적인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발행인 후원으로 '판소리감상회'를 100회 이상 주도해 판소리 완창이라는 기틀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글도 잘 써서 '뿌리 깊은 나무'에 판소리와 관련된 글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 글을 모은 책이 2013년 발간한 '비로소 알려진 보물'이다.  그동안 판소리는 우리 전통 음악이지만 쉽게 접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보형 선생 덕분에  '판소리감상회'는 '가뭄 속의 단비'였다. 물론 그런 판을 깔아 준 한창기라는 위인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명반 '뿌리 깊은 나무 판소리' 23장과 사설집이 1982년, 그리고 10년 후 2차로 음반 22장과 사설집이 선보일 수 있었던 것도 그 분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기적'같은 일이다. 만일 그때 녹음하지 않았다면 보물같은 소리는 허공속에 사라졌을 것이다. 샹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모두 한창기와 이보형의 '인연' 덕분이다.


 나는 카세트레코더를 앞에 두고 이보형과 수많은 소리꾼을 벗하며 토요일 일요일을 제외하고 5시 30분부터 6시까지 소리를 듣고 녹음했다. 사적인 생활은 모두 포기했다. 미팅은 꿈도 못 꿨다. 지금같이 '다시 듣기'가 없던 시절이라  방송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해성의 '수궁가'를 20일에 거쳐 녹음이 끝나면 마치 큰 전쟁을 이기고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최고의 명창이었다는 안향련의 소리도 그때 처음 들었다. 테이프는 점점 쌓였고, 그걸 본 어머니의 성화도 함께 늘어났다.

 

 1984년 12월 '신재효 서거 100주년 기념 완창 판소리'가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열렸다. 박동진의 '변강쇠타령' 성창순의 '춘향가'조통달의 '홍보가' 오정숙의 '수궁가'가 4일간 계속됐다. 이처럼 성대하게 판소리 완창 공연이 열린 건 아마 판소리의 르네상스였던 고종이후 처음이었을 것이다. 정말 많은 이들이 찾아와 대성황을 이뤘다. 4일간 그곳에서 소리를 들으며  감동의 회오리 속에 빠진 것은 순전히 길을 알려준 이보형 선생 덕분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설(발음)과 발림(표정과 몸짓)이 뚜렷한 오정숙의 열렬한 팬이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완창공연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몇 년 후 매달 상설'완창 판소리공연'이 열렸다. 짧게는 3시간 길게는 8시간 1인의 소리명창과 1인의 고수가 무대에 올라와 소리를 뽐냈다. 물론, 그 앞에는 많은 '귀명창'이 앉아 있었다. 이런 기적 같은 축제가 거의 30년간 계속됐다. 안숙선은 이 기간 24회 무대에 올라와 홍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춘향가 다섯 바탕을 완창했다. 우리 판소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듯 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여기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보형선생 같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이보형 선생의 부고를 제대로 써 준 언론은 거의 없었다. 안타까웠다. 이 글을 부고로 대신할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는 영광이겠다. 평생 소리만 찾아 다닌 진정한 '귀명창' 이보형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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