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김기덕
하마구치 류스케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았다. 언제 봐도 류스케 영화는 매력적이다. 소파에 뒹굴뒹굴 누워 보다가도 그 매력에 취해 어느새 정좌하고 영화에 하염없이 젖어있는 나를 보게 된다. '드라이브 마이카'도 말할 수 없이 좋았지만, 이 영화 역시 만만치 않다. 나는 날 것의 영화도 좋지만, 은유가 가득 찬 이런 영화도 좋다. 영화 상영시간이 길고('해피 아워'는 5시간이 넘는다) 대사가 많던 기존 영화들과는 달리 시간이 1시간 46분으로 짧아지고 대사도 크게 줄었다. 그가 변한 것일까. 오스카 유명세 때문에 나태해질 만도 한데 손수 각본을 쓰며 끊임없이 영화를 생산하는 류스케의 성실함이 나는 너무 좋다. 일본영화계는 지금 하마구치 류스케를 앞세워 부흥을 꿈꾸고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현재 일본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핫'한 감독이다. 197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이제 47세다. 그리 많지 않은 나이지만 그의 이름 앞에는 늘 '거장'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세계 3대 영화제라 불리는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를 섭렵한 것은 물론, '드라이브 마이카'로 2022년엔 아카데미 국제영화상까지 거머쥐면서 줏가가 크게 오른 탓이다. 오스카 덕분에 세계 4대 영화제를 모두 수상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름 석자가 있었다. 세계영화제 수상에 있어 하마구치 류스케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김.기.덕이다. 그는 2004년 '사마리아'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 은곰상(감독상)과 같은 해 '빈집'으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을 받았다. 2011년엔 '아리랑'으로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시선상, 마침내 2012년 '피에타'로 베니스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김기덕은 칸, 베네치아, 베를린 등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수상한 유일한 한국 감독이다. 박찬욱도 봉준호도 홍상수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다. 베니스가 유독 사랑했던 남자.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찬사받았던 감독. 그의 영화에 빠진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내면세계와 사회의 폭력성을 작가주의 시선으로 접근해 뛰어난 예술영화의 경지에 격상시켰다'며 격찬했다.
지금은 박찬욱 봉준호가 한국영화 위상을 높이고 있지만, 그 이전엔 김기덕 감독이 독보적이었다. 베니스 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 알베르토 바르베라는 김기덕 영화를 처음 보고 받은 충격을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다. "1999년 처음 집행위원장 맡았을 때 선정작업이 모두 끝난 후, 김기덕 감독의 '섬'을 보게 되었다. 강렬한 영상, 창작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여기에 기존 영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신선함. 그래서 '섬'을 경쟁부문 초청작으로 추가로 선택했다"
김기덕은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10대 때부터 청계천공장에서 일했다. 세상의 이치를 청계천에서 배운 것이다."(황금사자)상을 받는 순간 청계천에서 무거운 구리를 들고 다니던 열다섯 살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라고 했을 정도다. 야성적이고, 날것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그의 영화는 거의 모두 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김기덕은 정규 영화 교육도 받은 적도 없다. 그래서 중대학파니 동대학파니 하는 파벌에서 늘 자유로웠다. 그 자유로움이 그를 '중꺽마'로 무장한 튼튼한 아웃사이더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한국영화계의 풍운아' 김기덕 감독이 세상을 떠난 지 4주기 되는 날이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를 다루는 언론이 단 한개도 없다. 베니스는 김기덕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역병이 기승을 부리던 2020년 12월 11일 발트 3국 가운데 하나인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 합병증으로 눈을 감았다.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소문에 쫓겨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던 그가 이역만리 먼 땅에서 객사를 했다는 그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하지만 한국의 모든 언론은 약속이나 한 듯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던 이 '거장'의 죽음을 '별세' 대신 '사망' 운운하며 그저 그런 시정잡배의 죽음과 큰 차이 없이 다뤘다. 늘 아웃사이더였던 그는 죽어서도 변변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게 너무도 못마땅했다.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다. 자업자득이었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이제 김기덕 영화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때가 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기덕 개인의 행위를 미화하거나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가 밉다고 해서 그의 이력이 모두 지워져선 안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김기덕 영화에 대한 호감도는 극과 극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다. 생전 김기덕 감독은 어느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든 게)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때가 있어 사람들이 나의 영화를 알아봐 줄 것이라 믿는다." 다시 한번 김기덕 감독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