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원 Jul 26. 2024

어른이 된다는 것은, <소년시절의 너>




어른이 된다는 것은 괴롭다.


그러나 어른이 아닌 소년으로 산다는 것은 더 괴롭다. 어른이 되어 소년시절을 잊어버린 것 뿐, 어떻게 소년시절의 그들의 괴로움이 아무것도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소년시절의 너>는 어른이 된 첸니엔이 선생님이 되어 영어를 가르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was와 used to be의 차이를 말하는데 둘 다 과거시제지만 used to be는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첸니엔의 말을 따라 영어 문장을 따라하고, 첸니엔은 교실 안에서 주눅이 든 여자아이를 본다.

그리고 첸니엔은 과거를 회상한다.


과거 첸니엔은 방관하는 아이였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를 모른 체 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자살하고 모두가 그 아이를 카메라로 찍을 때 유일하게 나서 그 아이의 시체를 옷으로 덮어 준 아이였다. 그 탓에 왕따 피해자가 되었고, 첸니엔은 누군가가 자신의 의자에 뿌려놓은 피를 본다. <소년시절의 너>에서는 붉은색이 상징하는 바와 파란색이 상징하는 바가 명확하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십대, 그 아이들의 고통과 사랑을 상징하며 불완전한 것들을 상징한다. 정 형사가 동료 형사와 학교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먹었던 붉은색의 훠궈부터 의자에 뿌려진 피, 영화에서 시종일관 보여지는 붉은 조명 아래의 아이들, 붉은 조명 속에서 시체를 묻은 샤오베이까지. 그러나 그들 또한 어른이 되어간다. 심문을 받기 위해 푸른 색의 모자를 쓰고 자신의 죄가 아니라며 방관한 첸니엔과 결국 어른이 되어 푸른 옷을 입고 왕따를 당하는 아이를 도와주는 첸니엔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파란색은, 언뜻 보면 차갑고 우울한 색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 형사가 말했던 것처럼,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 있을 지 모르는 강에 뛰어들어야 한다. 끝없는 강에 뛰어들고 나먼 파란 멍이 들어있을지라도 그것을 마주한 순간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감독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왕따 피해자가 된 첸니엔은 완전한 지하세계에 사는 샤오베이를 만난다. 첸니엔이 착한 모범생이라면 샤오베이는 양아치라고 표현된다. 처음엔 삐걱이던 둘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같은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극중 샤오베이가 작문 과제를 읽으며 '하수구 속에 살아도 별은 볼 수 있다'라는 글을 읽고 첸니엔을 보는데 이것은 샤오베이에게 첸니엔이 별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샤오베이는 첸니엔을 보호해주고 첸니엔은 자신의 목표인 베이징 대학에 가기 위해 전념한다.

대입 전,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가 첸니엔을 찾아와 신고를 하지 말라며 찾아오고 말다툼을 하다 첸니엔은 아이를 밀어죽여버린다. 샤오베이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시체를 파묻는다. 그러나 대입 시험 날 비가 와 흙이 밀려나간 탓에 시체가 발견되고 심한 괴롭힘을 당했던 첸니엔이 용의자로 지목된다. 결국 샤오베이와 첸니엔은 서로를 모른 체 하고 샤오베이가 감옥에 가게 되지만 장 형사가 첸니엔에게 샤오베이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거짓말을 해 첸니엔이 자백을 하고 첸니엔은 4년형을 받게 된다.


마지막 장면, 햇빛을 받지 못했던 둘은 아이러니하게도 경찰차 안에서 햇빛을 받는다. 클로즈업된 둘의 얼굴은 두려움보다는 개운함에 가깝다. 인생에 가정법은 없다는 샤오베이의 말처럼 만약이러는 것은 어른의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뒤 돌 수 없고, 앞으로 가야만 하는 둘은 과거엔 그랬을지라도 지금은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장 형사라는 캐릭터였다. 왕따 피해자였고, 그 탓에 잠을 자지 못해 밤에 근무하는 경찰이 된 장 형사는 왕따를 당하는 첸니엔을 도와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현실이 그를 가로막아 괴로워한다. 영화에서 어른은 장 형사, 첸니엔의 엄마, 첸니엔의 담임선생님 정도로 나뉘는데 전부 그들만의 사정이 있다. 소위 어른의 사정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인데 그게 아이의 시각에서는 얼마나 이해되지 않고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잘 나타난다. 순수한 노랑색으로 상징되는 아이들에 비해 무채색의 칙칙한 옷을 입은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른의 시각에서 제멋대로 해석하려 든다. 아이의 입장에서 폭력과 다름없는 무관심, 그 아래 사는 아이들은 얼마나 어른의 보호를 필요로하고 있는지.

명문 대학에 가기 위해 양지에서 공부를 하는 아이들과 한밤중에 싸움을 하고 술을 마시며 도박을 하는 아이들의 교차편집은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샤오베이 또한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이고, 결국 어른에게 버림받은, 어른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첸니엔 또한 학교폭력 아래 보호받지 못했고 결국 그들을 보호해 준 것은 어른이 아닌 서로였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된 첸니엔이 왕따를 당한 아이와 함께 걷는 장면. 미성숙한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어른이다. 첸니엔은 더이상 과거에 살지 않고 이제는 그렇지 않기에, 과거에 사는 아이들을 지켜주어야 하는 것은 어른이다.

작가의 이전글 꼭꼭 씹어 삼키세요, 솔직하게 <더 웨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