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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타 Aug 02. 2024

이 주의 예술영화 : 존 오브 인터레스트

불가능의 재확인

이 주의 예술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2023, 조나단 글레이저 / 드라마, 역사 / 1시간 45분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의 가족이 사는 그들만의 꿈의 왕국 아우슈비츠.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이 만발한 정원에는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집. 과연 악마는 다른 세상을 사는가?(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가 시작되면, 암전된 화면 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은 단순한 효과일까, 희생자들의 절규일까,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한 음악일까? 우리는 그 소리의 정체를 뚜렷하게 알 수 없다. 영화는 그 시작부터 가능성을 시험하려 한다. 과연 홀로코스트의 비극은 스크린이라는 검은 장벽을 넘어 관객인 우리에게 와닿을 수 있는 걸까?      


장벽과 경계선. 이는 영화의 이야기에도 적용된다. 영화의 설정은 간단하다. 수용소 담장 바로 옆에 나치의 핵심 장교와 그 가족들이 거주하는 아름다운 저택이 있다. 담장 너머의 살육과 비명을 제물로 바쳐 세워진, 작은 유토피아. 그러나 이것은 실로 위태로운 유토피아다. 하늘을 보면 굴뚝의 연기가 보이고, 귀를 기울이면 아스라한 총성과 절규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과연 이 단란한 가족은 손을 뻗으면 바로 닿는 거리에 실존하는 악(惡)과 공존하면서, 이 유토피아를 지켜낼 수 있을까?     


장벽과 경계선

그러니까 결국 영화의 목표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첫째는 영화라는 장벽을 넘어 관객에게 홀로코스트의 비극성을 감각하게 하는 가능성의 모색이다. 둘째는 이야기 안에서의 가능성인데, 과연 영화 속 인물들이 담장 너머의 악(惡)에 끝까지 무감각할 수 있을까에 관한 탐색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목표는 때로 그 궤를 같이한다. 왜냐하면 관객과 영화 속 독일인 가족 모두, 비극에 무감각해졌다는 점에서는 성질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관객은 이야기를 멀리서 응시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그 저택에 초대받은 참여자가 된다(교묘하고 탁월한 촬영 방식이 이러한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두 번째 목표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다소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성취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미쳐가는 가족을 뚜렷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좁디좁은 복도와 잿빛 하늘. 한밤중에 이따금씩 솟아오르는 시뻘건 불길. 장모는 집을 떠나고, 아내는 점점 히스테리에 미쳐간다. 남편은 더욱 더 커다란 살육의 집행자가 되어가고, 소년들은 게슈타포를 흉내내며 병정놀이를 한다. 아기는 끊임없이 울음을 터트린다. 부부는 다른 침대에서 따로 자고, 소녀는 복도에서 잠을 설친다.      


그러니까 그들은 심오한 존재성을 지닌 악마가 아니라, 자기모순을 지닌 그저 평범하고 진부한 인간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폐쇄적인 공간에 유폐되어 있다는 점에 한에서는, 수용소의 재소자와 다를 바 없다(영화가 회스 대령이 복도의 불을 끄는 장면을 길게 보여주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들 역시 세계에 속해 있으므로, 현현하는 비극의 전염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그리고 그 비극성은 심지어 꽃에도 전염된다).      


그렇게 전염된 비극이 그들의 내면을 침식해갈 즈음, 마지막 시퀀스가 이어진다. 회스 대령은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인종 말살을 주도하는 실행자가 되었고, 회색빛 군인들은 황금빛 무도회장에서 그 계획의 성공적인 수립을 자축하고 있다. 파티가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던 회스 대령은 돌연 헛구역질을 한다. 그가 구역질에서 게워내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파티에서 마신 술일까, 양심의 변두리에 잔존하는 일말의 죄의식일까, 혹은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 관료의 부담감일까? 영화는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확증하지 않고, 그 행위의 의미를 그냥 공백 상태로 내버려둔다. 그리고 회스 대령은 복도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가 어둠 속에서 본 것

어둠 속에서 등장하는 것은 홀로코스트 박물관이다. 영화는 마침내 회스 대령으로 하여금 홀로코스트의 참혹한 결과를 응시하게 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박물관 안에 서게 함으로써 영화의 두 가지 목표 – 관객과 등장인물 모두에게 비극성을 감각시키기 – 를 한번에 성취하려 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와 현실, 극과 다큐멘터리, 과거와 현재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홀로코스트의 비극성 위에 의미의 토대를 세우려 한다.      


하지만 박물관을 비추는 숏들이 끝나면, 화면은 돌연 다시 회스 대령의 시점으로 전환된다. 그는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린 후 다시 어둠 속으로 하강한다. 관객 역시 영화가 끝나면, 엔딩 크레딧의 검은 장벽을 응시한 후 객석에서 일어나 극장을 나갈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성은 결국 그 어떤 영화적 방법으로도 결코 온전히 재현되고 전달될 수 없었다. 거기에, 그 불가능성에 그 비극의 본질이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 불가능을 재확인하는 영화다. 그 처절한 무력감에 전율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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