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불안, 설렘의 틈바구니에서
당신은 이제 하나의 세계를 등지려 한다. 익숙함과 안온함, 편안함과 안락함이 보장되는 그 세계를. 성인이 된다는 것은, 지나고 보면 그다지 별 것 아니지만 막상 마주하는 이들에게는 예측불허의 미로 앞에 서 있는 기분을 안겨준다. 추억과 불안, 설렘의 틈바구니에 서서 새로이 다가올 세계를 마주할 이들에게 위로 혹은 공감이 될 영화 세 편을 골라 보았다.
2014, 리처드 링클레이터 / 드라마 / 2시간 45분
제작기간은 무려 12년. <비포~> 시리즈로 잘 알려져 있는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1년에 15분 분량씩 촬영해 파노라마처럼 펼쳐낸 영화다. 어린 남매 '메이슨'과 '사만다'의 성장기를 아무런 기교나 장식 없이 자연스럽고 담백하게 담아냈다. 흡사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접근법을 취하고 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은 신기한 영화. 시간의 표피에서 건져올린 기묘한 현실성과 탁월한 연기 연출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부모의 불화와 급변하는 환경, 진로에 대한 고민, 미성숙한 사랑. 이 모든 일들은 흘려보낸 시간 속에 켜켜이 쌓여 소년을 어른으로 만들어간다. 사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이유로 간절한 유년기를 보냈다. 우리는 각자의 사정으로 절실했고, 아팠다.
<보이후드>는 그러한 유년기의 꼭짓점들을 선명하게 극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집요하고 차분하게 유년기의 발자국을 그저 묵묵히 쫓아감으로써 무뎌졌던 시간의 감각을 환기하는 방식을 취한다. <보이후드>는 당신이 그저 철없이 시간을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신이 온 힘을 다해 유년기를 버텨냈다는 사실을 위로한다.
1998, 웨스 앤더슨 / 코미디, 드라마, 로맨스 / 1시간 33분
명문 고등학교 러쉬모어의 졸업반 학생 '맥스'는 교내 신문 편집장에다 각종 클럽 회장, 연극단의 설립자이지만, 친한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이자 낙제생이다. 우울하고도 시끄러운 괴짜인 맥스가 학교를 다니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짝사랑하는 초등학교 선생님 '크로스'다. 낮은 자존감과 어머니의 공백으로 인한 애정결핍. 맥스는 콧대 높은 러쉬모어 학생들 사이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익히 알려져 있는 웨스 앤더슨의 초기작. 그의 특기인 아름답고 정교한 미장센 대신, 뛰어난 유머들과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포진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더욱 탁월한 것은, 결핍 때문에 흔들리는 자아를 포착해내는 세심한 각본이다. 청소년기는 어쩌면 사소한 결핍도 커다란 지진처럼 다가오는 시기가 아닐까.
웨스 앤더슨이 그 스스로 '가장 자전적인 영화'라고 평가했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는, 맥스의 좌충우돌 학교생활을 낄낄거리며 보다가도 이내 나의 청소년기를 반추하게 되어 슬퍼지는 영화다. 어른이 되기 전, 결핍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혔던 시간들을 용서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영화를 추천한다.
2001, 테리 즈위고프 / 코미디, 드라마, 로맨스 / 1시간 51분
졸업 직전, 고민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두 소녀 '이니드'와 '레베카'. 둘 중에서도 이니드는 어떻게 삶을 설계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한다.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지만, 좀처럼 해답은 얻을 수 없는 와중에, 이니드는 학교 수업과 단짝 레베카, 그리고 하나뿐인 가족 아버지에게마저 외면받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던 와중 이니드는 '시모어'라는 독특한 중년 남자와 기묘한 우정을 쌓아가게 되는데...
제목만 보고 오해하지 마시라. 타율 높은 코미디와 예쁜 영상미를 자랑하긴 하지만, 뻔하디 뻔한 하이틴 성장물은 아니니까. 오히려 그 반대다. 이니드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서늘한 진리에 접근해 간다. 그 진리란 바로, 인생은 근원적으로 혼자라는 사실.
어쩌면 당신은 이 영화를 보고 당황할지도 모르지만, 뜻밖의 지점에서 이니드에게 공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일찍 맛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그 고독감은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찾아온다. <판타스틱 소녀 백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 아 참, 이 영화의 원제는 'Ghost World'다. 영화에서 그 이유를 확인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