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가 2007년 아이폰을 발표한 일을 우리는 혁신의 이름으로 회자한다. 이 135그램의 작은 기기는 단순한 전자 제품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제 2의 심장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스마트폰과 함께 생활의 편리함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 과정에서 기술 혁신은 사회의 모든 영역을 재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 기술로 구성된 사회가 제공하는 사회상 앞에서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존재하는 것인가.
기술은 우리의 삶을 효율성과 편리함으로 가득 채우면서도, 통제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했다.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적 단절은 기술 혁신이 만들어낸 의도치 않은 결과물이었다. 우리가 오늘 알아볼 것은 이런 사회상 앞에서 젊은 세대, 특히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 20~30대 남성의 정치적 성향의 기저에 있는 심리이다. 그들은 기술이 만들어낸 사회적 가치를 거부하지만, 그 혜택은 누리길 원한다. 이 모순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필자의 눈에 젊은 보수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 과거의 전통적 보수는 사회적 위계질서나 종교적 가치를 옹호하며 보수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젊은 보수는 그들의 문화적, 역사적 지점에서 과거를 동경한다. 이들이 향수를 느끼는 대상은 군사독재나 산업화 시기의 위계질서가 아니라, 2000년대 초중반의 디지털 태동기다.
이 시기는 135그램의 작은 악마가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지배하기 이전이었다. 유튜브는 이제 막 태동했으며, 블로그와 인터넷 커뮤니티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 공간을 제공했다. 당시의 디지털 경험은 오늘날과 달리, 과잉된 기술적 자극보다는 비교적 단순하고 느슨했다. 20~30대 남성의 주요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가 시대별로 가지는 성향적 차이만 보아도 명확하다. 젊은 보수는 이 시절의 낭만을 동경하면서도, 오늘날 기술 체계가 만들어낸 과잉된 효율성과 집단적 통제를 거부한다.
실제로 이들이 ‘낭만’이라는 표현으로 회자하는 시대상은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의 사회의 전반적인 생활상을 담은 영상매체에서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특유의 개그코드를 이르는 표현이다. 당신도 한번 쯤은 멧돼지를 타고다니는 할아버지, 양철쟁반을 머리 위로 떨어트리고 몸을 거침없이 내던지는 예능 프로그램, 퓨전 사극이 등장하기 이전의 마초스러운 장면이 가득한 대하 사극, 지금보면 지나치게 위험해보이는 놀이터의 놀이기구가 나오는 유튜브 영상에서 ‘낭만의 시대‘라는 댓글을 읽은 적이 있을 것이다. 얼핏 보기엔 가벼운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이런 인터넷 밈들은 때론 그 너머에 과거에 대한 진지한 향수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있다.
세상에 혁신으로 알려진 큰 변화를 일으키는 발견은 정말 하찮은 일에서 비롯되곤 한다. 혁신이 거대한 시스템의 주체적이지 못한 현상에 불과하단 사실과는 별개로 말이다. 천문학계에 큰 충격을 준 허블 울트라 딥 필드는 당대 최고 성능의 우주 망원경으로 우주의 공허한 공간을 10일간 촬영한다는 엉뚱한 발상이 예상치도 못한 대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허블 우주 망원경의 조상격인 최초의 망원경도 네덜란드 안경 제작자의 우연한 발견에 의해 발명된 것이다.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혁신이라는 건 의외로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필연‘을 반증하는게 아닐까?
‘낭만’이라는 단어 또한 그렇다. 혁신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게 필연이라면 필연을 관장하는 ‘진리‘또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추론은 충분히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지금에서는 상상도 못할 우스꽝스러운 일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필자는 그 시대에 낭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생각한다. 스마트폰과 같은 기술은 24시간의 시간조차 부족하게 만들 정도의 풍요로운 미디어 콘텐츠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만족감은 변질되어 끝없는 콘텐츠의 포식을 갈망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은 정치극단주의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와 이를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는 플랫폼에서 밑빠진 독에 물을 붓듯 끝없는 콘텐츠를 단기간에 뇌에 퍼부어대지만 어째서인지 우리들의 갈망은 갈수록 커져가기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의 범람에 자연스레 따라온 현상이 있다. 인간이 첨단 기술과 그 체계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고 공포를 마주하여 분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헤겔이 자생능력이 없는 주인이야말로 자신의 노예에게 종속된 진정한 노예가 아닌지 역설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스스로가 기술과 그 체계의 주인이고 그로부터 풍요로움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들이 기술이 제공하는 콘텐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첨단 기술의 노예로 전락하지는 않았는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기술 체계는 이미 인간의 통제를 넘어섰다. 프랑스의 기술 철학자 자크 엘륄은 기술 체계가 단순히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자기증식적인 특성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기술은 인간의 가치를 재편하며, 사회를 효율성과 자동화라는 목표 아래 재구성한다.
젊은 보수의 심리는 모 유명 만화의 대사에서 그 본질을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선 인간은 공포를 느끼는 대상을 마주해 그 휘하에 들어가 비호를 받거나 그 존재를 멸살하는 두가지 선택을 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 대사는 대체로 정확한 편인데, 한가지 맹점이 있다. 만일 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대상에 매혹, 집착한다면 그들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바로 그 대상을 멸살하는게 아니라 존재하는 채로 굴복시키고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굴복과 지배, 이 상이한 두 입장은 우연히도 정치적 측면에서 양극화되어가는 두 진영이 첨단 기술을 마주하여 보이는 행동의 원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연은 “우연히” 필연과 맞닿아 있는 경우가 잦다. 실제로 기술 체계로부터 비롯된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인간은 자신들의 지위를 인정받고자 기술에 굴복하여 그 비호 하에 들어가거나 기술을 굴복시켜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두가지 행동을 취하며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젊은 보수가 기술의 혜택만을 취하면서도 기술 체계가 가져온 사회적 변화를 거부하는 태도는 이러한 딜레마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들은 과거로 돌아가기를 갈망하지만, 기술의 논리는 과거로의 회귀를 허용하지 않는다. 기술 체계는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미래로만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젊은 보수가 기술 체계의 사회적 영향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들이 이 코스믹 호러에 가까운 불가항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기술 체계는 이미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보수의 이러한 심리는 그들이 선호하는 콘텐츠 소비 패턴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유튜브와 틱톡 같은 플랫폼은 현대 기술 사회의 축소판이다. 초기의 유튜브는 비교적 정적인 플랫폼이었다. 긴 강의 영상, 브이로그, 일상적인 영상이 중심을 이루며, 콘텐츠 제작자와 소비자 간의 상호작용도 단순했다. 그러나 점차 플랫폼은 더 많은 시청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알고리즘을 발전시켰고, 이는 콘텐츠의 형식과 본질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오늘날의 유튜브는 10분짜리 영상 대신 1분도 채 되지 않는 쇼츠(Shorts)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우리의 집중력을 극단적으로 단축시키며, 더 많은 콘텐츠를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는 젊은 보수에게도 매력적이다. 다소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일베저장소 등의 보수의 수준을 넘어 극우의 성향을 보이는 일부 젊은 세대는 거의 무분별한 쾌락지향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보인다.이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기술적 발전으로 인한 사회상의 변화와 그로 인한 자신들의 권리가 새로운 사회상의 새로운 수혜자에게 빼앗기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엘륄은 기술 체계가 인간의 도구를 넘어 인간 자체를 기술 논리 아래 편입시키는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인간은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과 효율성에 길들여지고, 결국에는 기술의 논리적 필연성에 종속된다. 젊은 보수가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면서도, 기술이 만들어낸 사회적 구조를 비판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치적 양극화는 기술 체계와 인간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영역 중 하나다. 젊은 보수는 기술 체계가 가져온 정치적 양극화와 새로운 가치(이민자 수용, 인종차별 반대, 장애인 차별 반대, 페미니즘, 환경 보호 등의 가치)에 주로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 또한 기술을 통해 형성된 커뮤니티와 미디어 공간에서 활동하며, 기술의 논리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젊은 보수는 대중적 논쟁에서 유튜브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는다. 그들이 접하는 정보는 알고리즘이 선정한 콘텐츠에 의해 제한되며, 이는 그들 스스로의 의견을 강화하고 반대 의견에 대한 이해를 차단한다. 결과적으로 기술 체계는 젊은 보수의 비판적 태도를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기술 논리 속에 가둔다. 엘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인간이 기술 체계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인간은 기술을 통제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기술이 제공하는 구조 속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젊은 보수의 기술 비판은 이러한 구조적 모순 속에서 발생한 현상이다.
젊은 보수의 심리는 기술 체계와 인간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들은 기술 체계가 가져온 사회적 변화를 거부하면서도, 기술이 제공하는 혜택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기술 체계의 독립적이고 자기증식적인 특성과 인간의 모순된 심리가 충돌한 결과다. 기술 체계는 인간의 주체성을 위협하며, 우리를 선택의 자유가 없는 환경으로 몰아넣는다. 젊은 보수가 기술 체계에 대항하는 것은 단순한 세대 갈등이 아니라, 현대 기술 사회가 직면한 근본적인 딜레마를 상징한다. 이 문제에서 가장 절망적인 것은 젊은 진보가 지지하는 기술 체계가 제공하는 새로운 사회상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방향성 또한 본질적으론 하부구조로 기술 체계를 채택하는 만큼 필자가 언급한 현대 기술 사회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에 답을 내놓지 못한다.
자크 엘륄은 이 문제에 명확한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해 비관론자라 비판받았고, 그의 사상에 영감을 받은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무리한 반기술 혁명 방법론을 사회에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문제가 극에 달한 지금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과연 무엇일까. 고전적 공리주의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한다지만, 오늘날 세상이 공리주의에 요구하는 바는 아마 후세대의 행복까지 보장하는 시간 개념을 망라하는 공리주의일 것이다. 즉 엘륄이나 카진스키가 주장한 바와 같이 기술 사회의 확장이 후세대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현재의 사회는 마땅히 후세대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현재의 기술 사회를 지속 가능한 사회로 연장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구조를 탈바꿈해야 한다.
그러나 카진스키의 사례와 같이 현실적으로 혁명에 가까운 방법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가 제기한 문제의식은 적지 않은 이들의 호응을 받았지만 막상 이어지는 그가 제시한 것은 허황되고 공감받지 못할 막연한 방법론이었다. 설령 그의 방법론이 받아들여지더라도 아마 때는 너무 늦은 뒤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녕 우리는 이 불가항력 앞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외엔 방법이 없는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개개인의 개별적 문제로 본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J.R.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은 작품 속 여러 요소를 통해 황폐화되는 현대 사회를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였다.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이 되는 ‘절대반지’의 능력이 대표적이다. 절대반지의 투명화는 평범한 존재들에게서는 은신할 수 있지만, 악의 존재들(사우론, 나즈굴 등)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며, 절대반지를 포함한 힘의 반지들의 투명화 능력을 과도하게 많이 사용한 인간들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 채로 사우론의 악한 노예 , 나즈굴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이는 현대사회에서의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성이 가지는 부정적인 면모(악플, 디지털 성범죄, 해킹 등)와 그러한 행위를 저지르는 이들이 처음에는 익명성의 뒤에 숨어 부당한 힘을 행사할 수 있지만 종국에는 사이버 공간에 사로잡힌 악한 망령으로 전락해버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절대반지의 수명의 연장은 인간의 수명을 추가로 덧붙이는게 아니라 정해진 수명을 고무줄처럼 억지로 늘여놓는 방식으로, 현대사회의 발전된 의료기술로 인간의 평균 수명이 연장되어졌지만, 그로 인해 늙어서 골룸이 그랬던 것 처럼 자신이 가진 것들(아름다움, 건강, 능력 등)을 잃고 무의미한 고통스러운 여생을 보내며 그로 인해 안락사 문제나 고령 사회 등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을 연상케한다. 마지막으로 절대반지의 욕망의 증폭과 유혹은 반지의 가장 핵심이 되는 능력으로, 처음에는 소유자의 욕망을(이실두르-권력,보로미르-곤도르의 안전, 샘-모르도르의 정화) 증폭시키지만, 나중에는 소유자의 욕망을 증폭하는게 아니라 반지 그 자체에 집착하게 하여 반지의 노예로 만드는 방식인데, 이는 현대사회에서 과거의 사람들이 수련과 노력의 과정을 통해 결실을 맺어 성취감을 얻던 바람직한 방식이 잊혀지고 마약, 술, 도박 등의 일차원적인 쾌락에 집착하고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결과에 집착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결과만능주의로 귀결되기만 하는 것을 각각 의미하는 것 아닐까?
물론 톨킨의 시대에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이나 고령 사회, 안락사, 자본주의 사회의 결과만능주의 등의 문제가 거론되는 일은 전무했겠지만 필자가 내놓은 해석은 톨킨이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제법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라고 자신한다.
실제로도 톨킨의 세계관에서 악의 세력으로 등장하는 오르크, 고블린 등의 예시에서 증기가 사용되는 기구 등의 기술사회를 은유하는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반지의 제왕의 마지막 샤이어 전투가 영화에서는 어떠한 문제로 생략되었지만(분량 등의), 이 부분은 주제 의식 면에서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샤이어 전투에서도 사악한 인간들이 증기기관 등의 현대사회의 기술로 톨킨이 이상사회로 지향하던 샤이어를 무자비하게 망가뜨리자 그들을 격퇴하고 샘이 갈라드리엘의 선물로 샤이어를 복구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톨킨이 진정으로 바랬던 것, 발전하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잊혀져 가며 일부에선 멸시당하기까지하는 과거의 소중한 유산들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앞서 말한 내용 이외에도 반지의 영향으로 과도한 난쟁이의 욕심에서 비롯된 두린의 재앙, 스마우그와 용의 탐욕 등의 세계관 속 이야기에서 톨킨의 생각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다가오고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 톨킨의 사례와 같이 문화의 힘을 빌려 은연중에 기술 사회에 대한 비판을 공유하는 방식은 대중들에게 자크 엘륄의 복잡한 철학과 카진스키의 극단적 방법론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기술 사회에 대한 저항심을 함양할 수 있게 만든다. 설령 거대한 시스템을 상대로도, 완전한 탈피는 불가능할지언정 문제의식을 공유해 사회구성원들이 일신의 안위를 꾀하는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스템 전체를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그 목표를 현실에 맞게 사회구성원의 최대한의 행복을 개개인이 자율적으로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조정한다면, 그리고 과욕을 부리지 말고 방향성에 그저 만족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목표를 성취해낼 수 있다. 요컨데 대중적인 방식을 통해 우리의 반기술주의 가치관을 온건하게 공유하는 것이야 말로, 설령 그것이 각자도생에 불과하더라도 현재로선 최선의 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