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에서 PM의 역할

상황판단과 그에 따른 적절한 대처를 해내는 센스

by 기획자 마리

'지금 이 상황에서는 기획안 리뷰 못할 것 같은데, 아이데이션 회의로 바꾸시죠'


오후에 리뷰 미팅을 앞두고 오전에 시간을 잡아 시니어 PM들에게 사전 논의를 하는 자리였고, 지금 이런 기획안을 리뷰할 상황이 아니라는 답변과 함께 문서 리뷰를 취소하고 각 직군의 의견을 듣는 사전 논의를 하는 회의로 바꾸자는 답변이 돌아왔다.


미팅을 마치고 넋이 나갔던 것도 잠시,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기존에 리뷰 미팅이었던 회의를 아이데이션 회의로 변경한다는 안내를 전달했다. 공유하려고 했던 문서는 '없이' 회의를 진행한다고 쓰는데 가슴 한편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잘 준비해서 당당하게 공유할 문서는 이제 없었다. 미팅에서 같이 확인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다시 서비스의 큰 흐름을 볼 수 있도록 다이어그램을 준비하고 나서야 점심을 먹으며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투표 서비스의 0 to 1을 새롭게 개발해야 하는 프로젝트였다. 주요한 고객사와 처음으로 진행하는 빅 이벤트를 위한 프로덕트여서 중요도가 높았다. 다만 고객사의 요구사항에 맞추려면 개발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PM으로서 부담이 되었다.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정책 논의를 이끌고 상세 기획안을 작성해서 개발 시작 시점을 당겨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일정을 잡았다. 요구사항이 정리된 후 이틀 만에 상위 기획 리뷰 일정을 잡고 잠을 줄여 새벽시간까지 끌어다 문서를 정리했는데 그 문서가 통째로 까인 것이었다.


공들여 만든 기획서가 까였다는 감정의 동요가 일어난 것도 잠시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무엇이 문제였고, 나는 왜 그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했고, 결론적으로 왜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


문제상황은 이러했다. 아직 처음 만들어보는 구조에 대한 개발 논의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벌써 멀리 나아가서 상세한 프로세스를 정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정의하고 있었던 문서

PRD 문서 - Admin/User 상세 메뉴트리와 정책


현 상황에서 필요했던 문서

상위 정책서 - 데이터 구조를 논의하기 위한 큰 틀의 서비스 정책



'투표권'이라는 유저에게 횟수를 가진 권한을 제공해주어야 하는 서비스여서, 이 권한의 구조를 어떻게 잡을지부터 정리가 필요했다. 아직 구조가 정리되지 않았는데 상세한 부분부터 가져가면 개발자도 몇 가지 단어에 꽂혀서 그 논의를 하다가 결국 정말 중요한 커다란 골격은 하나도 정의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시니어 기획자의 의견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분명 알고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큰 틀이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PM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투표권을 어떻게 발행할 것이고, 관리할 것이고, 상태값을 처리할 것인지.. 기획자 관점에서 정의할 수 있는걸 먼저 정의해주려고만 하고 있었다.


인정해야 했다. 마음만 급해서 '적절한 상황판단'과 '어떤 대처를 해야 할지'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방향을 짚고 있었다. 혼자 먼저 정의하고 정리하는 게 필요한 시점이 아니었다. 아무리 급해도 아직 확정되지 않은 기본 데이터 구조에 대해서 각 직군의 담당자와 컨센서스를 맞추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백엔드 개발 관점에서 데이터구조가 먼저 잡혀야 하고, 다음 개발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면밀히 고려해봐야 했다.


그렇게 프로젝트가 어떻게 하면 잘 진행될 수 있을지 큰 그림을 그리고, 그 관점에서 무얼 준비해야 할지 차근히 생각해보아야 했다. '데이터 구조'를 정의해야 하면 어떤 방식으로 할 수 있을지, 사전 논의가 필요하다면 어떤 것들을 준비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이다.






'아이데이션 회의'로 변경된 회의시간이 돌아왔고 점심시간 동안 준비한 다이어그램을 보며 데이터 구조를 논의했다. 오전에 함께 논의했던 시니어 기획자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주고 미팅을 리딩했다.


상세한 정책은 없지만 큰 흐름의 서비스 플로우와 대략적인 데이터 구조에 대한 의견이 담긴 다이어그램을 보며 개발자들은 '서비스 플로우에 대해 궁금한 점', '우려하는 부분'에 대한 의견을 다양하게 전달해 주었다. 논의 흐름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려고 할 때마다 시니어 기획자는 다시 논의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게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투표권의 기본 뼈대'가 되는 주요 정책이 참석자 모두의 합의를 이루었다.


다시, 고객사의 요구사항을 처음 받고 PM으로서 액션을 해야 하는 시점으로 돌아가본다. 그땐 PM으로서 최대한 많은 것을 빠르게 정의하고 논의할 수 있도록 준비해서 '내가 해야 할 것을 잘 해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열심히 일하는 PM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임신, 출산에 대한 회사의 배려, 그리고 육아를 하면서도 4시에 아이를 하원시킬 수 있도록 해주신 배려에 눈에 보이게 보답을 하고 싶었나 보다. '나도 PM으로서 일을 이렇게나 열심히 잘하고 있답니다'하면서 말이다.


PM이 정말 해야 하는 건 상황에 대한 판단과 적절한 대처를 해나가면서 프로젝트가 잘 흘러갈 수 있게 이끄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혼자 많은 양의 정책서를 먼저 정의해 버리는 게 아니라, 모두가 발맞추어서 합의를 이루어가며 작업이 잘 되도록 하는 센스가 필요하다.


마음이 조급하더라도 한 발짝 떨어져서 멀리서 바라보기. 프로젝트의 큰 그림의 관점에서 PM으로서 내가 지금 액션해야 하는 부분이 어떤 것일지, 그 후에 진행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를 정리해 보기. 그다음에 어떻게 하면 속도감을 가져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아도 늦지 않다. 괜한 부담감과 인정욕구는 오히려 프로젝트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어갈 수 있음을 항상 유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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