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뭘 삼켰을까? 돌을 먹은 게 분명했다. 언제부터 먹었을까? 달콤한 디저트의 향을 지닌 딱딱한 돌.
선희는 회사 책상에 앉아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유나가 프사에 올린 10주년 결혼기념일 사진 때문이었다. 유나 부부의 뱃속은 어떨까? 청명한 종소리가 들릴 것 같은 빛깔의 찰랑이는 샴페인으로 채워져서는 말랑말랑하고 폭신폭신한 케이크를 스르르 녹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발리에서 신랑과 함께 썬쎗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친구 유나는 선희가 입사한 날 결혼을 했다. 선희는 약을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으며 생각했다.
‘10년 동안 단 하루라도 휴가를 낸 적이 있었던가?’
언제부터였을까? 새벽 5시에 독서, 7시에 헬스장, 8시 반에 아메리카노를 사서 9시 출근이 루틴이 되어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첫 출근 때 느꼈던 열정도 어느샌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열심히 운동하고 비타민을 꾸준히 들이켜는 것도 모자라 얼굴에 잔주름도 자글자글 생겼고, 몸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목련 몽우리는 하늘을 향해 반갑다고 인사를 하며 수줍게 올라오고 있었다.
‘너도 쉬다 오니 좋겠다. 나도 쉬고 싶다.’
하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이 느닷없이 휴직하기에는 너무도 무모하단 생각을 했다. 선희는 오늘과 내일, 이틀의 휴가 공지 이메일을 날리곤 회사를 무작정 나섰다. 어깨엔 가장 아끼던 고가의 명품 가방이 메어있었다. 회사를 나서는 길 후배가 물어왔다.
“팀장님, 이제 점심 먹으러 가세요?”
선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 가요!”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네이버 지도를 열었다. 평소 가고 싶었던 곳, 표시만 해 두었던 맛집, 숙소, 카페들을 하나씩 꺼내봤다. 몇몇 집들은 벌써 폐업하고 없었다.
건물도 없고, 검은 양복도 없고, 차도 없는 곳으로 신중하게 골랐다.
‘그래~! 여기야! ’
평소 주말에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 그래서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북한산의 큰 창이 있는 카페! 그곳에서 맑은 공기를 맘껏 들이마시고 속세의 영혼을 씻고, 복잡한 마음도 정리해야겠다 생각했다. 봄 내음도 맘껏 들이마시고 나면 내 뱃속도 말랑말랑 춤을 추며 잃어버렸던 소화의 희열을 다시 느낄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봄의 하늘은 정말 푸르렀다. 쌀쌀하면서도 따스한 바람의 노랫소리에 선희는 설렜다.
“가만 보자…. 북한산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고…” 핸드폰에 나오는 버스 노선들을 보며 아주 긴 노선 하나를 선택했다. 중간에 가다가 한 번 갈아타야 했지만, 오늘만큼은 시간에 쫓기지 말자, 다짐했다. 선희는 도착한 버스에 빠르게 올라탔다. 버스는 출퇴근 때와는 다르게 오늘은 선희 혼자였다. 창가 옆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희는 작은 디지털 세상에서 벗어나 버스가 움직이는 시선을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로 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팝송이 흘러나왔다. 선희는 노래와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몇 정거장을 지나고 선희 또래의 여자가 짐을 바리바리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어디서 부탁받은 물건인지 쇼핑백 가득 이름표들이 붙어 있었다. 여자는 언성을 높이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알았다고, 그러니까 왜 그런 걸 믿어! 바보야? 왜 이렇게 짜증을 내? 알았어. 보내주면 되잖아. 내가 놀아? 아! 몰라” 하면서 전화를 팍 끊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선희는 몇 정거장이 지나 다른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내렸다. 여자도 함께 내리더니 선희가 타려던 버스에 함께 올라탔다. 여자는 단말기에 카드를 찍었다. 여자는 잔액이 부족하단 소리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버스 기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제가 정말 오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기사님, 버스비가 없는데 오늘만 어떻게 안 될까요?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가 치매를 앓으시거든요. 네?”
선희는 오늘만큼은 본인의 일 외에는 신경 안 쓰고 싶었는데, 왠지 그 여자의 사정이 딱해 보였다. 그리고 왠지 신경이 쓰였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기사님, 제가 찍을게요.”
선희와 그 여자는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 여자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요양원에서 무슨 화장품? 그런 걸 80만 원이나 주고 사셨대요 말이 돼요? 정말 미치겠어요. 그 병원도 무슨 잡상인이 그렇게 들락거리는지… ”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선희의 시선은 많은 쇼핑백 꽂혔다. 옷 들이었다. 꽃무늬에, 반짝이에 정말 촌스럽기가 그지없었다. 여자는 선희의 시선을 눈치챘다.
“이 옷은 요양원에 가져가는 거예요. 거기 할머니들이 좋아하세요. 제가 옷 만들어서 드리는 봉사를 하거든요. 보시겠어요? 여기에 액세서리를 추가하고 싶은데 돈도 없고. 좀 아쉽죠.”
의상학과를 나온 선희는 순간 어릴 때 기억이 떠올랐다. 옷 만드는 것에 미쳐 밤새 재봉틀로 드르륵거리다 남자 친구와 싸우고 홧김에 헤어졌다. 헤어졌던 남자 친구는 지금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한다고 들었는데 인생은 참 알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같이 옷 장사나 했었으면 어땠을까? 상상은 달콤했다. 그랬다면 10주년 결혼기념일을 이 세상 어디선가 함께 즐기며 세상의 쓴맛을 단맛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리며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기분이 묘했다. 선희는 동대문에 가보고 싶어졌다.
“급하지 않으면 우선 동대문에 내려서 저랑 단추 액세서리 구경하시죠. 저도 봉사할게요”
여자는 반짝이는 두 눈으로 미안한 표정과 함께 기뻐했다. 동대문 가는 길에 여자는 본인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했다. 외동딸이라 했다. 아버지도 안 계셔서 본인이 요양원 비용을 매달 책임져야 하는 것이 너무도 버겁다고 했다. 여자의 사연이 안쓰러웠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회사 생활에 회의감을 가졌던 선희의 마음은 무색해졌다. 어느덧 버스는 동대문에 도착했다. 둘은 잠시 커피숍에 들렸다. 선희는 커피를 여자에게 건넸다. 선희의 손이 순간 미끄러지면서 커피가 쏟아졌고, 선희의 옷에 커피 냄새가 진동했다. 여자는 할머니에게 드리려던 옷 하나를 꺼냈다. 선희의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지만 커피 얼룩보단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계절보다 앞서 핀 화려한 꽃무늬 옷! 선희의 맘을 불편하게 했다. 그렇다고 어딘가 들려서 옷을 사기에는 시간도 없었다. 선희에겐 액세서리를 사러 가는 길은 너무도 길었다. 사람들이 선희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선희는 어딘가 숨고 싶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선희는 고개는 자꾸 아래를 떨궜다. 여자는 그런 선희의 마음도 모르고 말했다.
“원래 이쁘셔서 이런 옷도 잘 어울리세요.”
아침에 봤던 푸르렀던 하늘도 딱딱한 돌덩이 같은 구름이 삼켜버렸다.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내릴 것만 같았다.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에서도 화사한 꽃무늬의 선희는 단연 저 100미터 밖에서도 튀었다. 여자는 짐을 나눠 들고 뛰자고 했다. 장대비가 우두두 내리치기 시작했다. 선희와 그 여자는 미친 듯이 뛰었다. 비 때문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길거리에 사람들도 갑자기 내린 장대비를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희는 비를 피할 건물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선희는 여자에게 밀리오레 건물을 가리키며 그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건물 안에는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선희는 건물 안에서 여자를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길을 잃었을까, 다른 건물로 갔을까 봐 걱정도 되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선희 손에 들린 쇼핑백은 축 늘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옷을 입고 축축하게 젖어서 돌아다니는 선희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비켜 다녔다. 선희는 바로 눈에 보이는 옷 집에 들어가 빠르게 무채색 옷을 골랐다. 계산하려는데 보이지 않았다. 분명 출근할 때 들고나왔던 소장품 중 가장 비쌌던 명품 가방이 선희의 어깨에 없었다.핸드폰도, 지갑도 모두 가방 안에 있었다. 가방을 제외하곤 사람, 건물, 차 모두 선희 옆에 아침과 똑같이 있었다. 그제서야 여자가 비를 피해 가방을 들어준다면서 뛰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선희는 이 상황이 웃겼다.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스트레스 받았던 회사 일들도 선희의 맘을 괴롭히지 못했다. 장대 같은 비를 피하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본인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저게 뭐라고... 집이나 가자!’
선희는 노랫소리처럼 경쾌하게 들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건물 밖으로 천천히 나갔다. 그리고 가방을 마음에서 미련 없이 버렸다.
“선희니?”
안개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틈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