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했던 건?
나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문제아였다. 부모님이 원했던 고분고분한 아이도 아니었고, 공부도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교실에서 자주 오줌을 싸는 사고를 일으켰고, 집에서는 부모님 돈을 훔쳐 먹을 것과 장난감을 사는 데 써버리는, 아무리 혼내도 내 멋대로 하는 아이였다. 그 때문에 엄마는 나만 보면 한숨을 쉬었고, 아직도 엄마가 이모와 전화하면서 나 때문에 속상하다고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언니는 워낙 모범생에 공부도 잘해서 늘 백점을 받았다. 나는 언니와 자주 비교당하며 '난 안될 거야'라고 미리 포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받았는데, 내 기억에 70점 정도였다. 나는 내가 정말 공부를 못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했기에 70점이 너무 신기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싶어 신나서 집에 성적표를 흔들며 들어갔다. 물론 백점만 받아오던 언니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엄마가 내 성적표를 보고 너무 잘했다고 활짝 웃으며 칭찬해 주었다. 그때가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엄마의 칭찬을 받았던 순간이었다. 그게 너무 좋아서 그때부터 엄마에게 칭찬받겠다는 의지 하나로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듣고 시험공부도 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공부를 거의 안 했기 때문에 기초가 부족해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늘 잘하는 언니, 동생보다 꼴찌였던 내가 성적을 잘 받아오자 부모님은 더 많은 칭찬을 해주셨다. '내가 공부를 잘하면 부모님께 사랑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중 외국어 고등학교 시험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해 사촌 오빠가 시험을 봤지만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엄마가 나에게 시험을 보라고 하셨다. 나는 특별한 목표도 없었고 엄마 소원이니 한번 봐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험은 무척 어려웠다. '안 됐을 것 같아'라고 했더니 아빠는 나를 멍청하다고 욕을 하셨고, 엄마도 왜 공부 안 했냐며 실망하셨다. 사실 나는 외고가 뭔지도 몰랐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 채, 그냥 시험만 보러 갔다. 게다가 집에서 너무 멀었다 (난 목동 토박이고 학교는 정릉에 있어서 거의 한 시간 거리였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합격 소식을 들었다. 나는 '왜 내가 붙었지?'라며 어리둥절해했다. 물론 부모님께는 외고는 안 간다고 하고 중학교 수학여행을 갔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데 엄마가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 포기서를 냈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몰라서 그게 뭔데 하고 물으니 고등학교 진학을 안 한다고 했기 때문에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외고밖에 없다는 말이라고 하셨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내가 싫다고 했는데 왜 그 먼 데를 가야 하냐고 소리를 지르고 방에 들어가 울었다. 친구들과 같은 학교를 갈 수 없다는 것과, 내 의견을 묵살했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다.
물론 외고를 가서 친구들도 사귀고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늘 나는 '시험을 잘 못 봤는데 혹시 나에게 전산 착오라고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면 어쩌나' 싶어 불안했다. 3년 내내 스쿨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가끔 늦게 일어나는 날은 아빠가 차로 데려다주시곤 했다. 그때마다 게을러서, 잠을 너무 많이 자서 버스를 놓쳤다고 온갖 욕을 들으며 가곤 했다. 학교에는 부유한 집 아이들이 많이 다녀서 당시 보기 힘들었던 외제차들을 잔뜩 볼 수 있었다. 아빠의 그랜저가 초라해 보이기도 했고 욕도 그만 듣고 싶어 언덕 밑에서 내려달라고 걸어가기도 했다.
대학 원서를 쓸 때가 됐을 때 나는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고려대 국문과를 추천하셨는데 아빠는 언니가 대학을 떨어진 것과 재수해서 전문대를 간 것 때문에 하향 지원을 하라고 하셨다. 당시 내 꿈은 집에서 독립해서 사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부모님이 나에게 어떤 기대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화가 나서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부모님은 여자니까 여대를 가라고 숙대나 이대를 말씀하셨고 나는 계속 안 가겠다고 해서 부모님이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고 마지막 날 이대에 원서를 냈다. 결국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내 의견은 없었고 나는 그렇게 부모님의 뜻에 따라 원하지 않는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난 열등감이 심했어서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여대생들 속에 위화감을 느꼈다. 일부러 추리닝에 바바리코트를 입고 큰 백팩을 메고 학교를 다녔다. 당시 나는 그저 부모님께 반항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서 모든 게 다 부모님 탓이라고 원망만 하며 4년을 보냈던 것 같다. 중간에 더 다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 부모님과 상의 없이 휴학을 했는데 담당 교수님이 부르셔서 왜 휴학을 원하는지 물어보셨다. 학교가 너무 다니기 싫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했으면 좋았겠지만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집이 쫄딱 망해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힘들다고 더 이상 학교를 못 다닐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는데 교수님이 눈물을 보이시면서 얼마나 힘들겠냐고 그래도 한 학기만 쉬고 다시 복학하라고, 성적도 괜찮으니 복학하면 근로장학생 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너무 따뜻하게 이야기를 해주셔서 결국 한 학기 휴학만 하게 됐다. 지금도 내가 왜 그랬나 싶어 너무 부끄럽고 나 때문에 정작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친구들이 받지 못했을 것 같아 미안하다.
부모님은 내가 코스모스 졸업을 한 이유를 복수 전공하다 늦게 한 줄 알고 계신다. 당시 여행 자율화가 시작되면서 친구들이 어학연수를 다녀오곤 했는데 나도 학기 중에 어학연수를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은 내가 다시 복학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아시고는 대학 졸업하면 가라고 하셔서 어학연수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는 인터넷도 거의 활성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도서관에 있는 잡지들을 보면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들을 찾아봤던 것 같다. 돌아보면 어이없지만 영어를 쓰는 나라들 중 어학원 하나씩을 골라 편지를 써서 제일 먼저 답장이 오는 곳을 가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필리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이렇게 여섯개 나라에 있는 어학원에 편지를 보냈다) 영국에 있던 어학원에서 연락이 와서 졸업과 동시에 일 년 계획으로 영국으로 가게 됐다. 당시 내 목표는 나를 답답하게 옥죄는 부모에게서 떠나기였지 영어를 배워서 어떤 삶을 살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