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카로운 감성의 부딪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를 처음 보기 시작할 때, 심드렁하게 제목을 보고 무얼까라고 상상을 해보았다. 여자 주인공 둘이 나온다는 이야기에 또 고정관념인 ‘여자의 적은 여자다.’를 들고 나왔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달랐다. 날카로운 감성들이 서로 부딪히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이중적인 느낌이다. 차갑고 따뜻한 그 중간의 어딘가.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가 산산이 부서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둘의 초등학교 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리얼함이 남아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은 아는 이야기. 일영이지만 어느 한 군데의 신도시를 보여주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맞겠지 싶은데, 그 시대 그 도시가 아니더라도, 그 시절 초등학생이라면 겪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서 재미있게 보았지만, 시대의 폭력성은 그대로 보여주는 예가 있었다. 이를테면 가족 사항을 면담도 아니고 반 아이들이 다 앉아 있는데 손들기로 조사하는 장면에서는 안타까웠다.
그 폭력성이 존재하던 시절을 은중과 상연이 겪어나가면서 서로를 이길 수 없다고 평한다. 나중에 그들은 커서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오히려 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의 집안이 역전되면서 또 다른 관계가 시작되지만 서로에게 오해 아닌 오해가 생기고, 상연은 점점 자기 파괴적인 성격으로 나아간다. 오해를 푸는 게 어렵게 느껴지는 상연은 미움받을 용기가 있는 사람이지만 그 대신 상처투성이다.
30대가 되어 그들은 다시 만나지만, 돌아올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다. 상학 선배에 대한 집착과 은중에 대한 경쟁심으로 영화사를 차려 은중의 작품을, 돈을 주고 구매하지만, 결국 훔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을 한다.
그렇게 둘은 절교한다. 남과 같이 변한 그들. 새폴스키가 쓴 “행동”이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들은 그렇게 그 시기를 넘어서면서 무관심 아닌 무관심으로 지낸다. 그러나 은중은 은중의 뜻대로, 상연은 상연의 뜻대로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가며 시간이 지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상연은 다시 은중과 친구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시간이 별로 없다. 자신의 남은 재산을 주고, 그녀가 바라는 것은 스위스에 가서 조력 안락사를 선택하는데 은중이가 동행하기를 바란다.
상연은 ‘고통의 끝에서 끝까지 다 보았다.’라고 하며 자신의 선택에 대해 말해준다. 은중은 처음에는 그것을 외면하지만 결국 상연을 친구로, 스위스 조력사 여행에 동행하기로 한다.
서로의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상연은 자신을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저주 아닌 저주를 말한 은중에게 이야기한다.
‘네가 받아주는구나, 끝내.’
은중의 동료였던 언니는 은중이 상연과의 동행을 반대한다.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며 반대하는데, 결국 은중은 동행을 하고 상연의 마지막을 함께 한다. 그리고 드라마는 바다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 웃는 은중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이 드라마 리뷰를 찾아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엘레나 페렌테의 나폴리 4부작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글을 쓰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들이 비슷한 측면이 있으나, 뒷부분의 스위스 조력사 이야기가 나와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흘러간다.
그냥 단순히 두 여자의 우정으로만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1인 가구가 많아지는 요즘, 그리고 의료의 발달로 인해 원하지 않는 연명 치료가 화두가 되는 시대에서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무언의 의문을 던진다. 과연 상연의 동행 제안에 은중처럼 같이 갈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생각을 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