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익명의 기획자 Jul 31.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

담장 너머로 악마를 보았다

최근 시네필들 사이에서 화제인 영화가 있다. 조나단 글래이즈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영화다.

가장 대중들에게 유명한 이동진 영화 평론가도 별을 다섯 개나 주었다고 하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그런 예술 영화다.


내가 이 영화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하게 된 계기는 합정역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영화사 대표님의 추천이었다. 700만 관객을 동원했던 한 역사 영화의 기획자이기도 하신 대표님께서 최근 너무나도 강렬한 작품을 만났다고 내게 추천해 주셨다. <추락의 해부>를 통해, 이미 쉰드라 뮐러의 팬이 되었던 내게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주연도 그녀라는 이야기만큼 구미가 당기는 사실은 없었다. 소재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집으로 돌아와 주저하지 않고 예매하기 버튼을 눌렀다.


평소 스포일러를 보고 영화를 감상하는 것을 선호하는 나는, 가끔 영화에 대해 일부러 아무런 배경 지식을 쌓지 않고 상영관으로 들어갈 때가 있는데 거기에는 몇 가지 나만의 기준이 있다.


첫째, 독립영화나 예술 영화의 범위 안에 속하는 작품일 때.

둘째, 영화가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일 때.

셋째, 그날 나의 기분에 따라.


거창한 기준은 아니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은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특히, 두 번째 이유에 해당하는 '원작의 유무'는 내게 꽤 중요한 이슈인데 기본적으로 '잘 만든' 영화는 원작을 아예 모르는 상태에서 그 작품을 감상하더라도 온전히 관객에게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세 가지 나만의 기준을 모두 충족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과감하게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충격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암흑인 스크린과 기묘한 사운드가 이내 관객들을 압도했다.

그 영화가 담고자 하는 역사가, 그 사실이, 이미 너무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그 잔혹함의 크기가 클수록 묘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마도 감독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해석하면 말 그대로 '이익 지대'인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마이너스의 미학'이 아닐까.


제 아무리 역사에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대한민국에서 고등 교육을 마친 성인이라면 학창 시절 한 번쯤은 그 유명한 수용소 이름에 대해 들어는 봤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이 영화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를 보지 않고, 우연히 나의 글을 읽게 된 누구라도 다시 앞으로 돌아가 암흑의 스크린과 기묘한 절규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상상해 보라고 한다면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학살이었다. 

화면에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고, 어떠한 대사도 얹지 않은 채 그저 생생한 사운드로 추측하게끔 한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페이크 다큐를 연출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제3자의 관점에서 루돌프 회스 중령의 일상을 조명한다. 정확하게는 관망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지는 눈부신 초록, 그 위로 부서지는 햇살,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이따금 거북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담 너머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의 절규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와 저택 사이에 담 하나를 두고 펼쳐지는 천국과 지옥. 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없기에 우리는 마음껏 상상할 수 있고, 양심껏 역겨움을 느낄 수 있다. 


실화를 기획하는 일을 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 바로 묘사의 범위와 깊이다.

흔히 말하는 고증은 과연 어디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순도 백 퍼센트의 사실이 과연 대중들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인지. 사실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나의 수많은 취재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인정했다. 사건을 대하는 관점에 따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때때로 우리는 과감하게 묘사라는 행위를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은 사실을 은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참혹함을 느끼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회스 중령은 끝까지 자신의 평온한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키기 위해 전력을 쏟는다.

그의 아내, 아우슈비츠의 여왕도 마찬가지다.

담 너머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수많은 유태인들이 화형에 처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너무나도 애절한 눈빛으로 그곳에 자리잡는 것이 자신의 오랜 꿈이라고 고백한다.

회스 중령 일가를 무뎌지게 했던 그 일상이 결국 악의 평범성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시가 됐다.

나는 그것이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한 진짜 소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어떠한 감상도, 입장도 강요하지 않은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시점에야 비로소 관객들은 영화의 극 후반부에서 회스 중령이 거듭 보여 줬던 '아무것도 발설하지 못한 구토'가 무슨 의미였는지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된다.


지금껏 지속적으로 다루어진 소재 '아우슈비츠와 유태인 학살'에 대해 우리가 이토록 신선함과 경외심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앵글 때문이었으리라.


그 앵글의 출발점을 잡는 것이 기획자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오늘도 무겁게 깨달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