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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킴 마케터 Aug 06. 2024

내가 "패션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어느 날

'패션테러리스트'에서 한순간에 모두가 궁금해하는 '스타일리시'한 여성으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소개팅 첫날, 나의 옷 코디는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고민 끝에 완성됐다.
‘검은 원피스에 흰색 카라가 크게 들어가 있으니 디자인이 너무 평범해 보이지 않고, 검은 스타킹에 보석이 여기저기 박혀 있으니 센스 있어 보이고, 여기에 핑크색 패딩까지 입고 나가면 저 멀리서도 나를 한눈에 알아보겠지?’
자신만만한 그날의 코디 덕분에 남편과 소개팅으로 만나, 일 년의 연애 후 결혼까지 했다. 신혼 초 어느 날,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나는 한참 옷을 차려입고 난 후, 항상 그랬듯 습관처럼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나 오늘 어때?”
남편은 쳐다본 듯 만 듯한 눈길로 내 옷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응, 예뻐.”
무심하게 한 마디 하고는 다시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것이다. 나는 남편에게 성의 있게 코멘트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남편의 얼굴빛은 싸늘하게 바뀌었고 무언가 작정한 듯 말하는 것이다.
“내가 한번 제대로 코멘트해 줘?”
이 말을 내뱉자마자 바로 방에 들어가더니 내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옷은 색상이 애매하고, 저 옷도 거추장스러운 디테일이 너무 많아 촌스럽고, 이 옷의 핏도 너에게 안 어울려.”
남편은 단호하게 말하며 내 옷들을 하나씩 옷장에서 꺼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새 내 옷의 50%가량의 아이템들이 모두 옷장 밖으로 처참하게 내팽개쳐졌다.
“이 옷들은 다 마음에 안 들고, 모두 버렸으면 좋겠어.”
진심 어린 말투로 호소하듯이 나에게 말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나름대로 미적 감각을 요구하는 ‘브랜드 매니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옷을 잘 입는다고 자부했으며 분명 나의 센스 있는 소개팅 코디로 결혼까지 한 것 아닌가? 내 남편은 더 충격적인 한 마디를 이어갔다.
“이 중에 최악은 소개팅 첫날 입었던 검은 원피스에 핑크색 패딩이야!”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친 이발사처럼, 남편은 오랜 시간 홀로 끙끙 참아왔던 엄청난 비밀을 드디어 입 밖으로 내뱉은 것 마냥 그 누구보다 홀가분해 보였다.


나는 옷을 잘 입는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건 이후, 남편의 의견이 틀린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친한 친구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네가 상처받을 까봐 이제까지 말은 안 했지만, 가끔 너와 만날 때 너의 화려한 패션 때문에 민망한 적도 있었어.”
한 친구 한 명은 내 남편의 코멘트를 듣더니 반색하며 그 용기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중학교 때부터 허심탄회하게 모든 이야기를 공유하던 가장 친한 친구조차, 이제까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누군가에게 “옷 못 입는다”는 말을 하기는 굉장히 어려울 일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라도 그 사람의 옷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위하는 마음에 스타일에 대한 비판을 감수한다고 해도, 상대가 그 사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이고 깨닫지 못한다면 옷 입는 스타일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내가 이렇게 온 몸에 꽃으로 뒤덮인 모습으로 등장할 때면, 친구들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평소 옷을 잘 입는다고 자신하고 있었기에 이 사건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나는 마케팅 부서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업무 특성상 미적 감각이 요구되었다. 지난 십 년 간 브랜드 매니저로서 광고에 나오는 톱스타 모델들의 옷 스타일을 선택했고, 그 외에도 브랜드의 색감과 디자인도 총괄하는 일을 했다. 코카콜라를 담당했던 시절에는 광고 홍보물을 직접 디자인한 적도 많아서 주변에서 ‘디자이너 킴’이라는 별명까지 지어주지 않았는가? 브랜딩(Branding)을 하는 사람이 정작 나 자신을 브랜딩 하지 못했던 것인가? 단순히 옷 스타일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내가 브랜드 매니저로서 자격이 있었던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면 ‘옷 잘 입는 사람’의 기준은 무엇인가? 패션 런웨이를 보면 모델들은 큼직한 꽃무늬 패턴, 눈에 띄는 화려한 색상,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과감한 디자인의 옷들로 잔뜩 무장하고 있던데 이것이 ‘옷 잘 입는 사람’의 기준이 아닌가? 이러한 시도를 따라 한 것뿐인데, 왜 나에게는 가혹한 평가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고 자존심도 상했다. 이것이 내가 마주한 냉혹한 현실이라면, 이제까지 고집했던 습관들을 버리고, 옷을 잘 입는 법을 하루빨리 찾아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옷 잘 입는 법은 어디에서 어떻게 배울 수 있는 것일까? 그 누구도 방법을 가르쳐준 적 없었고,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노하우를 통해 옷을 입는 것 같았다. 마치 옷을 잘 입는 법은 나와 거리가 먼 소수의 사람들만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비밀스러운 파티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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