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1년간 100권이 넘는 옷 관련 책을 탐독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옷장 정리에서 비롯되었다. 많은 책이 옷장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나만의 스타일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말해주었다. 1년의 여정이 끝난 지금, 내 옷장은 더 이상 스트레스의 근원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을 주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예전에는 출근 준비를 하며 옷장을 열 때마다 깊은 한숨을 쉬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상당했다. 아무리 정리해도 금방 어질러지는 옷장은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늪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마침내 그 늪에서 벗어나 나만의 행복한 옷장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 글을 통해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며, 내가 어떻게 나만의 행복한 옷장을 만들어 갔는지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싶다.
옷장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고 할 정도로, 옷장은 한 인간의 성격, 구체적인 미감, 색채와 형태에 대한 이해, 삶을 바라보는 관점들이 담겨있는 광맥鑛脈이다.” - <옷장 속 인문학> 김홍기
김홍기 작가의 <옷장 속 인문학>에서 "누군가의 옷장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라는 말이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실제로 옷장은 매일 아침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장소인 동시에,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떤 옷을 선택하고 구매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공간이다. 즉, 옷장 안에 쌓인 선택들은 곧 우리의 철학과 삶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김홍기 작가는 이어서"옷장 큐레이션"(Wardrobe Curation)"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는데, 이는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옷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에 맞는 옷들로 선별해 옷장을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큐레이션" (Curation)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Curare", 즉 "돌보다, 관리하다"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전시를 기획하고 작품을 선택하는 활동을 의미하던 용어였다. 큐레이터는 예술 작품을 선별하고 배치하며, 그것을 해석해 관객에게 특정한 메시지나 경험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처럼 "큐레이션"은 단순한 관리의 의미를 넘어선다. 특정한 주제나 목적에 따라 자료나 작품을 선별하고 그 맥락을 제공하는 창의적인 작업으로 발전했고, 이러한 개념은 "옷장 큐레이션"으로 진화했다. 옷장을 단순히 정리하고 관리하는 것을 넘어, 그 안에 나의 개성과 창의성을 반영하는 과정을 통해, 옷장은 나만의 특별한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는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곳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나에게옷장이라는 공간은 그저 옷을 보관하는 창고에 불과했다. 내가 주기적으로 옷장을 정리하거나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없었다. 옷을 고르고 매치하는 게 번거로워 쇼핑몰에서 완성된 스타일을 그대로 사는 일이 많았고, 한두 번 입고 나면 금세 싫증이 나 또 다른 스타일을 구매했다. 어느새 퇴근 후 유명 쇼핑몰을 둘러보며 인기 아이템을 사는 것이 나만의 작은 취미가 되었다. 택배 상자를 열고 새 옷을 입어보는 순간적인 기쁨에 빠져들었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옷장이 옷으로 가득 차면 찰수록 그 순간의 즐거움은 옷장 속에 묻혀버린 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 옷장을 들여다보고 옷의 수를 세어보니, 300벌이 넘었다. 그 수치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더 놀라운 건 그중 실제로 입는 옷은 몇 벌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한 번도 입지 않아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 있는 옷들도 많았다. 그동안 나는 트렌디하고 인기 있는 옷들만을 사들이며 옷장을 채웠지만, 그 옷들이 나의 진짜 취향이나 정체성을 반영하는지 고민한 적은 없었다. 옷장이 터질 듯 넘칠 때마다 친구들에게 옷을 나누거나 버리곤 했지만, 여전히 쇼핑은 멈추지 않았고 옷들은 계속해서 쌓여갔다.
내 옷장은 항상 옷들로 가득했지만, 정작 "왜 이렇게 많은 옷 중에 오늘 입을 옷이 없을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는데 이 현상이 '선택의 역설(Paradox of Choice)'과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의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그의 저서 The Paradox of Choice에서 선택지가 많을수록 자유보다는 오히려 결정 장애와 스트레스를 겪게 된다고 설명한다. 나도 수많은 옷들 앞에서 "입을 게 없다"는 딜레마에 빠졌던 것은 바로 이 선택의 역설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매일 아침 옷장 앞에서 "오늘 입을 옷이 없다"는 좌절감을 느꼈던 건, 결국 그 옷들이 나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았고 심지어 나와 맞지도 않은 수많은 옷들 앞에 선택 장애로 스트레스가 과중된 것임을깨닫게 되었다. 옷장은 단순한 수납공간이 아니라, 나의 개성과 삶의 방식을 담아내야 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유행에 휘둘려 옷장을 가득 채우기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며, 어떤 개성과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로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질문들을 나의 직업적 경험, 즉 브랜드 마케팅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나 자신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는 과정에 이르렀다.
"단아하고 이지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나다."
참고로, 이러한 한 문장에 이르기까지의 고민 과정은 "나만의 패션 스타일을 브랜딩하다"라는 이전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루었다. 10년간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며 쌓은 브랜딩 경험을 바탕으로, 나만의 정체성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나의 정체성 확립은 300여 벌에 달하던 옷을 113벌로 줄이는 데 성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놀랍게도 옷의 수가 줄어들면서, 나의 고민거리와 스트레스도 함께 사라졌다. 나의 정체성에 딱 맞는 옷들로만 채워진 옷장을 바라보면, 매일 아침 무엇을 입을지 설렘과 함께 기분 좋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나만의 행복한 옷장이 완성된 것이다. 이제는 옷들에 파묻힌 듯한 느낌이 아니라, 그동안의 고민과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에서 벗어나 한결 자유로워진 기분까지 만끽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나만의 공간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옷들만으로 구성된 옷장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삶에 작지만 큰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다음 편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옷을 정리했는지 팁을 자세히 공유할 예정이다).
단순히 '옷을 잘 입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이 여정이, 나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는 과정으로 이어지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더 나아가, 평생에 걸쳐 나만의 옷장을 관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되면서, 옷을 입는다는 행위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왜 옷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민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패션을 다른 지식의 영역보다 다소 가볍고 피상적이라고 여겼던 나의 무지함에 부끄러워졌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말처럼 '보이는 것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철학을 떠올리면, 옷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는 곧 한 인간의 존재와 자아를 깊이 탐구하는 통찰의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같다. 옷은 단순한 장식이나 유행을 따르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가치관, 경험, 그리고 내면의 이야기를 반영하는 강력한 매개체이다. 매일의 옷 선택이 단순한 외형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임을 깨달을수록, 옷장 관리는 곧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만의 행복한 옷장]
왼쪽은 나의 옷장이며 겨울 옷은 맨 윗칸에 따로 보관했고 여름/가을용 옷들로만 걸어두었다. 오른쪽은 일주일동안 입을 옷들을 따로 코디해두어 아침에 바로 입을 수 있도록 분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