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 K Moon Nov 02. 2024

노동, 밥, 잠 그리고 반복

맛집에 몇 시간이고 줄을 서서 기어코 그 음식을 먹어보고야 마는 사람들을 보고 나는 생각했었다.

‘탐욕적이다 ‘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는 그런 행위 역시 ‘행복을 위한 집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반복되는 노동의 삶 속에서(먹고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모든 일) 틈틈이 열심히 행복을 추구하며 살지 않으면 쉽게 불행해지니까. 노동에 나를 잠식당하게 하지 않으려면 찰나일지라도 몇 분, 몇 시간 혹은 며칠의 탈출,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한 것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위는 몇 분의 탈출, 여행은 몇일의 탈출이 되겠지.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다 보면 하루에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뇌와 육체가 모두 손상되어서 휠체어에 의존한 체 언어능력도 잃고 대소변은커녕 혼자 밥숟가락을 들어서 자신의 입에 먹을 것도 넣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허공만 응시하며 보내는 마이클을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마이클이 살아있는 게, 살아만이라도 있는 것이 마이클의 가족에게는 분명 기쁜 일이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이런 삶이 지옥 같겠지. 하나님, 마이클은 당연히 천국 가겠죠. 천국에서는 자유로운 몸과 정신으로 항상 웃으며 살게 되겠죠.‘


식사시간에 그의 런치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삼키기 좋도록 믹서기로 갈아서 죽처럼 만들어진 점심이 들어있었다. 회사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작고 부드러운 플라스틱 스푼으로 떠서 그의 입에 떠먹여 주었다. 그는 숟가락이 입 앞에 다가오면 자동적으로 입을 벌려 음식을 삼키는 것을 반복했다. 그의 런치가방에는 후식으로 초콜릿 푸딩이 들어있었다. 초콜릿 푸딩을 한 스푼 떠먹이자 마이클의 몸짓이 달라졌다. 몸이 수저 앞으로 쏠리고 입을 좀 더 크게 벌렸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마이클이 지금 행복하구나.‘


행복의 정의를 엄격히 따지자면 그 초콜릿 푸딩은 즐거움과 쾌락의 범주이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마이클에게는 그 초콜릿 푸딩을 먹는 그 순간만은 확실히 행복한 순간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먹는 행위에 조금 더 진지해지고 조금 더 노력하게 되었다. 음식의 가치가 너무 과장되어서도 혹은 폄하되어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맛보다는 어떤 음식을 먹는 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장애인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내가 일하는 회사에 오는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대부분 건강한 음식을 거부한다. 물대신 주스나 커피를 좋아하고, 몇 몇 장애인들은 몇 년 동안 절대 한번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억지로 입을 벌려 물을 먹일 수 없으니 달콤한 주스 원액을 물에 타서 먹인다. 그런데 또 너무 주스를 조금 넣으면 마시기를 거부하니 수분섭취를 위해서는 결국 주스던 뭐던 달달한 뭔가를 탄 물을 줄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야채보다는  고기나 소시지를, 잡곡빵보다는 흰 빵을, 과일보다는 달콤한 푸딩을 원한다. 심지어 입에 들어온 한 수저의 음식에서도 혀로 야채를 정확하게 찾아서 뱉어내는 장애인도 있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거의 평생을 부드럽게 갈린 음식만 먹고 살아온 장애인들이 그나마 더 건강한 음식을 먹게 된다. 미트볼 스파게티를 갈아주면서 야채도 섞을 수 있으니까.


노동, 밥, 잠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밥이 그나마 우리에게 확실하고 즉각적인 행복을 선물하는 것 같다. 먹기 위해 일한다는 사람도 있으니…

그런데 밥을 하는 노동은 먹는 만족도에 비해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다.

엄마는 아버지 밥 해주기 싫다고 언제나 괴로워하셨는데 60여년 동안 밥을 하시고 결국 치매에 걸려서 그 밥 하는 노동에서 벗어나셨다.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엄마에 대한 연민과 함께 불안감이 엄습한다. 나도 엄마처럼 되면 어쩌지…


내가 한 집밥 사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