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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Aug 14. 2024

딸의 예술중학교 이야기

3화_꿈을 먹고 자라는 아이


딸이 학교에 다녔는지 제가 학교에 다녔는지 모를 한 학기가 숨 가쁘게 지나가고, 여름방학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저는 연금을 받을 때까지 다닐 줄 알았던 직장을 14년 만에 퇴사하고 난생처음 학부모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모임이 영 어색하고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단한’ 엄마들의입담을 듣고 있노라면 기가 빨리는 면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예술중학교에 들어온 ‘삐약이’ 엄마였던 저에게, 이 모임은 의외로 고급 정보를 얻을수 있는 고마운 자리였습니다. 제가 대단한 엄마들의 경쟁 상대가 아니었던지라 어렵지 않게 ‘발레 전공맘의 꿀팁’을 전수받을 수 있었던 걸 생각하면, 어디에서나 신입은 값없는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엄마들과 관계의 낯섦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저는 어느새 이 공동체에 녹아들고 있었습니다.

 


예술중학교 무용과 학생들은 여름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가을에 있을 예술제 연습에 들어갑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전 무용과 학생들이 모여 군무를 연습하는데 가만히 있어도 더운 날, 오전 내내 땀을 흘리며 연습에 집중하다 보니 연습을 끝내고 나오는 아이들의 볼이 하나같이 벌겋게 타올라 있었습니다. 연이어 소그룹 수업에 가야 하는 딸 아이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습니다. 다른 아이들 수준으로 올라가려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친 생각과 방학인데 쉬지도 못하고 이게 뭔가라는 유약한 생각이 충돌할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엄마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소그룹 선생님께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하얀 거짓말을 하고, 우리는 예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브런치 카페로 갔습니다. 코를 간지럽히는 고소한 커피 향과 아늑한 분위기가 오늘은 좀 풀어져 보자는 우리의 일탈에 제격이었습니다. 딸 아이가 고른 메인 디쉬 두 개와 평소에는 잘 사 주지도 않았던 달달이 슬러쉬까지… 우아하게 먹을 겨를도 없이 접시 바닥까지 싹싹 폭풍 흡입한 아이의 얼굴은 금세 웃음꽃으로 만개했습니다.

 

“oo아, 엄마가 생각해봤는데, 꼭 우리 학교 아니어도 편하게 발레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왜?”

“한 학기 다녀 보니까 엄마 생각에는 네가 너무 힘들어보여. 오늘도 방학인데 쉬지도 못하고 연습만 하다가 하루가 다 가고, 내일 또 학교 가야 되잖아. 학교가 머니까 다니는 데 힘들기도 하고… 집 앞에 있는 학교 가면 아침에 일찍 안 일어나도 되니까… 발레는 학원에서도 계속할 수 있어.”

 

엄마가 오늘 웬일인가 하고 따라왔던 딸 아이는 저의 뜬금없는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습니다.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 없이 제 얘기를 듣던 아이는 그동안 저에게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나 우리 학교 다니는 거 좋아. 선생님들도 좋고 친구들도 좋고… 실기 시간에 선생님한테 혼날 때는 슬프기도 한데 선생님이 계속 혼내시는 건 아니야. 내가 다음 시간에 또 혼날까 봐 걱정하고 들어가면 선생님이 다 잊어버리셨는지 많이 늘었다고 칭찬도 해 주셔. 레슨 끝나고 배고파서 마카롱 10개씩 먹고 싶을 때도 있는데 그거 먹고 살쪄서 후회하는 거보다 차라리 안 먹는 게 더 나아. 엄마가 매일 계란이랑 방울토마토 싸 주잖아. 배고플 때 그거 먹으면 진짜 꿀맛이야.


그리고 엄마가 못 데리러 오는 날 혼자 버스 타고 집에 오면 좀 힘든데 자주 그러는 거 아니니까 할만해. 내 친구 중에 혼자 인천에서 다니는 애도 있어. 걔에 비하면 나는 모 힘든 것도 아니지. 그리고 나 어떨 때는 일부러우리 집 버스 정류장 전전에 내려서 집까지 걸어올 때도 있어. 시원하게 바람 쐬면서 걸으면 머리도 맑아지고 운동도 되고 좋아. 그러니까 나 계속 우리 학교에서 발레 하면 안 돼?”

 

딸 아이의 말이 끝나고 목 끝으로, 눈동자 안으로 무언가가 울컥 쏟아져 나왔습니다. 속 깊은 말을 끊지도 않고 담담하게 술술 내뱉는 딸을 마주하니, 한 학기 동안 선생님들 눈치를 살피면서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무던히 애썼을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습니다.

 

“힘든데 뭐하러 전에서 내려. 버스 타고 오지. 너 그러다 길에서 쓰러지면 경찰서에서 엄마한테 전화 온다.”

 

딸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감정이 과잉으로 치닫는걸 간신히 진정시켰습니다. 딸 아이가 왜 힘든 이유를 일일이 나열하면서도 힘들지 않다고 애써 부정하는지,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아마도 조그만 몸에 응집된 강단이 딸 아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발레를 쉬지 않고 결국 꿈을 이뤄낸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딸 아이는 하루하루 발레를 더 사랑하며 본인에게 맞는 일을 찾아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스스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부지런히 제 길을 열어가는 딸을 지켜보는 것은, 부족한 엄마인 저에게 매우 과분한 일입니다. 제가 정해놓은 틀 안에 아이를 가두고 안달복달하며 키웠던 지난날이 후회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제 계획이 아이의 꿈을 한 뼘 아니, 그 반의 반 뼘이라도 자라게 하지 못한다는 걸 그때는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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