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두부들의 아등바등 스타트업 생존기
대표님과 외부 미팅을 다녀오고 나서 짬뽕을 먹으러 갔다. '순두부 짬뽕'이 대표 메뉴인 유명한 짬뽕집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메뉴였다.
나는 매콤한 향기와 고소한 냄새가 섞인 짬뽕을 바라봤다.
"대표님, 이거 꼭 저희 같네요."
자극적이고 메콤한 국물에 담겨 있는 하얀 순두부를 보니, 우리 회사를 보는 것 같았다.
우리 회사는 바이오텍 스타트업이다. 실험 대행이나, 질병관리청으로부터 백신 후보 용역을 받아서 단백질을 생산하는 단백질 생산 전문 기업이다. 그리고, 화장품 원료도 생산해서 우리만의 브랜드로 화장품을 판매하고 있다. 스타트업인 것만 해도 이미 척박한 길인데, 한국에서 레드오션 화장품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정말 말 그대로 매콤한 짬뽕국물 속에 잠수하는 것이다.
그런 짬뽕국물 속에 헤엄치고 있는 우리 회사의 총 3명의 순두부를 소개하려 한다.
대표님, 연구원님, 그리고 나.
순두부 1. 대표님
대표님은 서울대 생명과학 박사에 카이스트 조교수를 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스펙을 가진 과학자이자,
음악을 아주 사랑하는 감성적인 인프피다. 생물학과이셔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딱딱한 과학자나 "이과생"의 이미지와는 참 다르다. 둥글고 친근하며, 꾸밈이 없다. 선호하시는 인재상은 삼시세끼 밥 잘 먹는 건강한 사람이며, 자연인과 같은 삶을 살아도 행복할 것 같은 분이다. 그리고, 음악을 정말 사랑한다. 실제로 작곡과에 합격한 적이 있었지만,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 때문에 생명과학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 화장품 브랜드를 기획 했을 때, '음악이 흘러나오는 화장품'이라는 아주 독특한 아이템으로 시작하려 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 기획에 그쳤다.)
순두부 2. 연구원님
마찬가지로 인프피인 연구원님은, 대표님과 나와 참 성향이 잘 맞는 것 같다. (참고로 난 엠비티아이 과몰입자, 인프제다.) 직원이 3명뿐이지만 우린 밥도 다 따로 먹고, 대화도 옆자리여도 거의 채팅으로 한다. 내향인들에게 참 안성맞춤인 환경이다.
비전공자인 연구원님은, 이쪽 분야에서 너무 간절하게 일해보고 싶다고 해서 대표님이 채용한 분이다. 대표님 아래서 열심히 배워서, 지금은 웬만한 전공생과 전문가보다도 실험을 더 잘하는 능력자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당연히 전공생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해서 정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거의 실험실에만 있어서 직장 내에서 대화를 할 기회가 많진 않지만, 정말 온화한 분이다.
순두부 3. 나
나는 중학교 때부터 영화감독의 꿈을 꾸며, 영화과에 입학했다.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나의 꿈은, 1학년을 마치자마자 바뀌었다. 영화 현장은 내 상상과 예상보다 훨씬 험난했고, 나의 성향과는 잘 맞지 않았다.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영화감독은 포기했다. 그렇게 졸업을 하니, 감독은 하기 싫지만 글은 여전히 좋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평소에 쓰던 이야기들이 애니메이션이나 동화와도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동화를 쓰기로 결심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스무 살 때부터 쭉 알바를 해오던 나는, 어쩌다 올리브영 알바를 하게 되었고 생각보다 잘 맞아서 꽤나 오래 하게 되었다. 이야기 창작에 대한 열망은 있지만, 왠지 모르게 영화 관련 회사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혼자 방에서 글을 쓰는 게 아니면, 회사의 형태로는 영화나 방송과 관련된 일은 일절 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올리브영 일 하면서 화장품에 대한 애정이 생겼고, 이를 기획하거나 마케팅하는 일에 관심이 생겼다. 글을 쓰면서도 역시나 돈을 벌기 위해 올리브영 알바를 계속했고, 이 경력은 나를 이 회사로 올 수 있게 만들었다.
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우리는 직원이 3명뿐이다. 즉, 우리의 화장품 브랜드와 관련된 일은 거의 내가 다 맡아서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직책이 BM이긴 하지만, 그냥 이것저것 다 한다. 뭐 하는지 물어보면 딱히 뭐라 설명할 게 없다. 여느 스타트업 직원과 같이, 그냥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다.
기획과 브랜딩은 창작하는 부분이 많고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 있는 판을 깔아줘서 좋다. 화장품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많은 나에게는 이렇게 내 의견이 들어간 화장품 브랜드를 운영해 볼 수 있다는 점은 정말 매력적이다. 대표님께서 나의 의견도 많이 존중해 주시기 때문에 나는 꽤나 자유롭다.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건 정말 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 새로운 분야에서 내 길을 개척하려니 막막하다.
나는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속은 정말 한없이 부서지는 겁 많은 순두부이다.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 항상 시달린다.
이런 순두부에게는 그 어느 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스타트업의 세계는 공포 그 자체다. 더군다나 이런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려니, 숨이 턱턱 막힐 때가 많다. 그 어느 누구도 나를 압박하거나, 채찍질하는 사람이 없지만 이 포지션의 무게가 참 나에게는 무겁게 다가온다. 신나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짜다가도, 갑자기 찾아오는 불안이 날 짓누를 때가 많다. 회사에서 회의하고 기획하면서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다가도, 집에 와서 실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한없이 순두부처럼 무너질 때가 많다. 뭐 하나 제대로 해보기나 하고 힘들어하면 이해는 하겠는데, 한심하게도 제대로 도전해 보기도 전에 덜컥 겁에 질려 도망칠 때가 많다.
"젊을 때 한번 망해봐야 해. 망해보는 것도 경험이야."
회사에 입사한 첫날, 대표님께서 해주셨던 말이다. (금붕어 기억력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맥락이었던 것 같다.)
"이건 망할 거야."와, "망해도 괜찮아"는 차이가 있다.
모든 일에 잘 되지 않을 거라고 저주하듯이 사는 건 좋지 않겠지만, 나 같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망해도 괜찮다는 말은 위로가 되는 말인 것 같다. 짠하고 불쌍한 모습만이 남아 있는 멋없는 결말에 나를 등장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모든 일의 각을 미리 재보고, 각이 나오지 않으면 일찍이 포기하곤 한다. 그러나 오히려 어떤 일을 실패한 사람의 결말이 멋있을 때가 많은 것 같다.
"나 사업하다가 망했어."라는 말을 뱉는 사람은, 적어도 끝까지 완주한 사람인 거니까. 그런 사람들의 말과 조언에는 힘이 있다. 뭣도 모르면서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경험하고 눈으로 몸으로 느끼고 온 사람들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전문 지식 없이, 사람이 어떠한 분야에 가장 빨리 전문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실패해 보는 것이라고.
그래서, 여기에 내 다짐을 한번 박제해 보려 한다.
적어도 실패가 두려워서 중도포기하는 사람은 되지 않겠노라고. 회사가 정식으로 망할 때까지 (?) 내 최선을 다해 한번 달려보려 한다.
이렇게 자기 세뇌를 하고도,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또다시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겠지만, 우선 오늘의 마음가짐은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