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적 존댓말을 적절하게 쓰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런 재미있는 말씀을 해 주셨다.
‘옛날 어느 시골, 넉넉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가풍이 엄격한 집에서 며느리를 보게 됐다. 조신한 며느리를 데려오기는 했는데 많이 배우지 않아서 가르쳐야 할 것이 많았다. 제일 먼저 고쳐야 할 것이 격식에 맞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특히 어른들에게 법도에 맞는 존대를 제대로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시시때때로 존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쳤다. 며느리는 성심을 다해 배우고 익혔다.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입에 붙지 않은 말을 외운 대로 기억하며 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머리에 검불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늘 같은 시아버지의 머리에 검불이 붙었으니 큰 일 날 일이었다. 당장 떼어 내야 마땅하지만 시아버지의 머리에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당황한 끝에 급하게 튀어나온 말이 바로 “아버님 대갈님에 검불님이 붙으셨습니다.”였다. 이 소리를 들은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기가 막힌 나머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우리 어머니는 교훈을 당의정에 넣어 재미있게 말씀해 주셨고 그 효과는 나에게 강하게 각인됐다.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당의정의 효과가 아마도 어머니의 의도 이상으로 오래 지속된 것 같다.
오래전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요즘 우리의 말 습관이 그와 유사해지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냐.”고 “어이가 없다.”며 웃었던 얘기가 지금은 꼭 웃을 얘기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커피가 뜨거우실 거예요.”, “이 음식이 인기가 높으세요.”와 같은 표현이 일상적으로 자주 듣게 되는 요즘의 경어법이다. 고객을 응대하는 과정에서 친절을 보이려다 상대와 연결된 사물에까지 경어를 쓰게 된 것이다. 앞의 옛날이야기에서 ‘검불님’과 다를 바가 없다. 대체로 고객을 상대하는 업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존대의 과잉은 일상생활로까지 연결되고 있다.
누군가의 행위를 설명할 때 대체로 과도한 경어가 등장한다. “걸어가시던 분이 갑자기 넘어지셨는데 근처에 계셨던 분이 빠르게 뛰어 오셔서 도와주셨어요.” 어떻게 한 구석도 빠뜨리지 않고 이처럼 경어법을 구사할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심지어 범죄 용의자에게 말을 걸 때에도 경어를 쓰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분을 왜 찌르셨습니까? 후회하지 않으세요? 하실 말씀 없으세요?” 무죄 추정을 준수하는 원칙적 태도라고 봐야 할까?
예전에 대학교에서는 동년배 사이에 보통 심각한 존대를 쓰지는 않았다. 아직 익숙한 사이가 아니라면 평상어의 끝에 ‘-요’ 정도의 어미를 붙여, ‘-했어요.’와 같이 가벼운 경어를 썼다. 그러다가 익숙해지면 평어를 쓰게 됐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는 경어에서 쓰이는 선어말어미 ‘-시’가 대체로 들어간다. ‘-했어요.’가 아니라 ‘-하셨어요.’가 된다. 학생들은 발표에서도, 보고서에서도 ‘-님이 이렇게 하셨고, 저렇게 하셨고.’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불만을 표시할 때도 예컨대 이런 식이다. “팀 작업에 참여하시라고 몇 번이나 연락을 드렸지만 끝까지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같이 수업을 듣는 동료들에게 아주 깍듯한 경어법을 사용한다. 나의 동료 한 사람은 어떤 학생과 이러한 대화를 나누다가 경어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 “아, 너의 동료분이 그렇게 하셨어요?”라며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반문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우리말에서 호칭은 경어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호칭에는 가장 최고의 것이라면 상황과 무관하게 무엇이든 갖다 붙이고야 만다. 남성을 부를 때 사용되는 직함이 ‘-사장님’으로 통일된 지는 제법 된 것 같다. ‘-씨’나 ‘-선생’ 정도가 오랜 용례였다면 ‘-님’이라는 말이 등장해 확산되더니 더 상위의 표현으로 ‘-사장님’이 자리를 잡게 됐다.
사장은 기업의 대표라는 직함이기도 하고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최고 지위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일상의 호칭 ‘-사장님’에는 후자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런 대화의 초기에 듣고 있기가 거북해서 사장이 아니라고 토를 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상황을 오히려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이제는 익숙해져 그러거나 말거나 잠자코 있는 편이다. 나를 부르는 호칭에 매번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여성에 대한 유사한 상황의 호칭은 ‘-여사님’인 것 같다. 그냥 여사도 아니고 ‘-여사님’이다. 여사가 이미 높여 부르는 단어여서 여기에 ‘님’까지 붙인 것은 불필요하거나 어색한 표현이다. 혹시 비아냥거리거나 얕잡아 볼 때 역설적 표현을 의도했다면 그렇게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여사님’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진지하게 사용하는 경칭이다.
나의 어린 시절 ‘-여사’는 공식적 호칭으로 여성에 대해 가장 높여 부르는 단어였던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대표적인 ‘여사’였고 이후 대통령 부인들이 대체로 ‘-여사’였다. 물론 존경받을 만한 여성을 지칭할 때 간혹 ‘-여사’가 쓰이기도 했다. ‘-여사’가 하늘 높은 곳에서, 거기에 ‘-님’까지 붙여 땅으로 내려왔으니 민주화됐고 평등해졌다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말 어법에서 호칭이 까다롭고 때로 불편하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그래서 다른 한편에서는 권위적 분위기를 타파하는 방법으로 호칭을 없애자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바로 이름을 부르기가 어색하니까 따로 별명을 만들어 평칭으로 부르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상하 간에 위계가 강한 스포츠 조직이나 기업에서 시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백안시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지만 이를 보도하는 뉴스는 대부분 긍정적인 시도로 평가하는 것 같다.
이러한 평칭화 운동이 혁신의 방안으로 주목받는 것과는 반대로 사회 전반에서는 ‘모두의 존칭화’가 생활화되고 있다. 뉴스에 나오지도 않고 신경 쓰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마치 모두가 조용하게 합의한 듯이 그러한 변화가 전개되고 있다.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며느리처럼 가르치는 ‘권력’이 있고 그렇게 해야 할 원칙을 정해 놓은 것도 아니다. 누가 주도하는 것도 아니고 제도를 만든 것도 아닌데 상대 높이기 경쟁이 벌어지듯이 경어법은 갈수록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이제 어떤 상황의 대화에서든 상대를 최대한 높이지 않으면 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 같아 불편해질 지경이다.
대화법은 사회 상황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 방식을 보여주는 표상이다. 경어의 사용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것이다. 경어가 일상화를 넘어 점차 강도를 높여 간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 간에 존중과 배려가 깊어지는 방향으로 사회가 진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작은 다툼이 큰 폭력으로 비화되고 소소한 의견 차이가 끝내 철천지원수로까지 치닫는 현상이, 경어법이 강화되는 요즘 나타나는 사회적 변화 아닌가? 걸핏하면 문자 폭탄이 난무하고, 같은 상황에서도 되도록이면 모질고 심한 표현을 써야만 후련하게 느끼는 것이 요즘 분위기 아닌가?
이런 불일치는 사람들의 일상 행동에 방어와 위장의 심리가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허울 좋은 말로라도 상대를 높여 놓아야 나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판단에서 이러한 행동이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경계의 수위를 높인다는 것은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일인가? 그래서 경어의 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다면 희극적인 것일까, 비극적인 것일까?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모두가 사용하게 된 대화법은 사회적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것 자체가 관계의 성격을 규정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말하는 대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하는 방법만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어떤 요인의 표상인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경어법에 심하게 일그러진 우리의 일상사가 짙게 배어 있다. 최근 사회구조의 변화는 우리의 일상과 관계방식에까지 돌이키기 어려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