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작은 대학도시 케임브리지에 처음 온 것은 1998년 하순이었다. 한국에서는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추진되고 있을 때였다. 마침 그런 시기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방문 연구원 자격을 얻어 영국과 한국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게 됐다.
국내에서는 위기에 대한 반성의 하나로 서구의 ‘합리적’ 제도를 대거 수용하자는 논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IMF의 강한 요구도 여기에 한몫했다. 이런 흐름은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화 또는 국제화의 이름으로 시작됐다. 이른바 글로벌스탠더드 운동이었다. IMF 위기는 여기에 더해 거대한 쓰나미 수준으로 한국의 경제 사회 구조를 개조하는 계기가 됐다.
나의 시야에는 그즈음에 전개된 움직임 중 이른바 문화운동이 인상적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서구의 양식 있는 문화와 생활습관을 본받자는 사회적 캠페인이었다. 주로 해외 경험이 많거나 현지 생활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공익광고나 글을 통해 홍보원의 역할을 했다. 많이 강조된 현상 중 하나가 서구인들의 몸에 밴 ‘양보 정신’이었다. 자동차 길에서 다른 차에게 자리를 내주는 양보, 통행문을 밀고 닫을 때 뒤에 오는 사람을 배려해서 잡아주는 행동 등이 흔히 거론됐다. 내가 본 많은 글에서 그들은 그런 현상을 경험하며 모두 놀랐고 감탄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소위 글로벌스탠더드로, 한국 사회가 받아들여야 할 세계적 행동양식으로 제시됐다.
그때까지 나는 길지 않은 출장 외에 해외에서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없었다. 출장 때 충분히 느껴보지 못한 그러한 말들에 대해 긴가민가했다. 그런 행동으로 문화적 서열을 매기는 것이 과도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말 그런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1998년 하순부터 케임브리지의 방문 연구원 생활이 시작됐다. 이국적 정취를 느끼는 것은 잠시,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거주할 집을 구하는 것은 여행지의 숙소를 알아보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지도를 보고 길을 파악하고 마트를 찾아다니는 것도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말도 설고 기후도 설고 무엇보다 생활습관이 한국과는 매우 상이했다. 그만큼 새로 적응해야 할 일이 대단히 많았다.
얼마간을 지낸 후 자동차를 구입하게 됐다. 케임브리지는 큰 도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자가용의 편의성이 아주 높은 곳이었다.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을 가게 되면 거의 자가용을 이용하게 됐다.
어느 도시나 그렇듯 케임브리지에도 붐비는 도로가 있고 한산한 도로도 있다. 출퇴근 시간에는 도로에 따라 제법 정체가 심한 곳도 있지만 모든 도로가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도로에는 늘 어느 정도의 자동차들이 움직이고 있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사람들의 행태를 관찰할 수 있는 적절한 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케임브리지의 도로에서 자동차들은 정말로 넉넉하게 양보하고 상대방을 충분히 배려했다. 신호가 애매할 때 먼저 가겠다고 머리를 들이미는 자동차를 본 적이 없다. 폭이 좁아서 한 대씩 번갈아 가야 하는 길에서는 마주 오는 차와 한번 이상은 서로 양보를 하다가 주행을 하게 된다.
‘아, 그들은 정말 양보가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좌(우) 회전 신호를 잘못 읽고 뒤늦게 차선을 바꾸려 할 때에도 걱정할 일이 별로 없다. 옆 차선의 자동차가 거의 영락없이 자리를 내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문에 잠깐 서있어야 하는 직진 차선의 뒤차가 그 사이 경적을 울리는 법도 없다. 그들은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큰길로 접어들 때에도 교통규정으로는 큰길의 주행차가 먼저이지만 한 대씩 번갈아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큰길의 주행차가 양보를 해주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정체가 제법 심할 때에도 다르지 않았다. 서로 그랬다. 그들은 항상 입장을 바꾸어 넉넉하게 배려하는 사람들 같았다. 글로벌스탠더드를 운위 하며 서구의 품위 있는 생활양식을 거론하던 사람들의 주장이 맞았다. 나 역시 놀랐고 감탄했다. 그런 주장을 냉소적으로 바로 보던 나는 슬며시 나의 관점을 내려놓았다.
얼마 후 케임브리지에서 차를 운전하고 런던으로 나갈 일이 생겼다. 런던 외곽에 사는 친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런던은 복잡하고 낯선 곳이어서 보통 대중교통을 이용했지만 친구의 집은 외곽 주택가여서 운전을 해서 가기로 했다. 친구도 런던 도심과는 다르다며 운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런던은 그러나, ‘양보의 글로벌스탠더드’가 없는 도시였다. 차선이 복잡하고 길이 익숙하지 않아서 나는 종종 양해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런던 사람들은 케임브리지의 사람들과 완전히 달랐다. 양보는커녕 조금만 꾸물거리면 비켜서라며 경적을 울려댔다. 그러다 못 참겠으면 위험하게 추월을 하곤 했다. 몇 개월 동안 케임브리지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경적소리가 셀 수 없이 귀를 때렸다. 모든 것이 급하고 빨랐다. 애매한 신호에서 빨리 끼어들지 않으면 나의 자리를 영 찾을 수가 없었다. 도로가 붐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습관으로 보였다. 2시간 여 운전해서 가는 동안 나는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어깨와 팔이 거의 경직될 지경이었다. 다시는 런던에 갈 때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랜 기간 서울에서 단련된 나의 운전 실력이 케임브리지의 생활 몇 달 사이에 모두 퇴화됐나 싶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케임브리지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오래전에 유학했던 친구 하나가 얼마 전 케임브리지를 방문한 후 “과거 500년 동안 변한 것보다 최근 일 이십 년 사이에 더 바뀌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500년까지는 모르지만 여러 사람의 방문 경험을 토대로 과거 30-40년을 유추해 보면 그런 말을 할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중심 상가의 건물이 헐리고 첨단 현대식 새 상가가 들어서 도시경관을 바꾸었는가 하면 도심 외곽에는 대규모 주택단지가 연이어 조성됐다. 최근 10년 동안 케임브리지시의 인구만 20%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케임브리지 생활권에 포함된 외곽 지역까지 합하면 그 규모가 훨씬 커질 것이다. 출퇴근 시간에 케임브리지시의 진출입 도로는 주차장이 된다. 전에 없던 일이다.
도시의 확장은 케임브리지에도 생각지 못했던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저런 일로 종종 방문하는 케임브리지에서 지금은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낯설지 않게 됐다. 조금 꾸물거리거나 차선의 문제가 생기면 어디선가 빵빵 소리가 들린다. 2000년대 초 중반에는 일 년이 가도 들어볼 수 없었던 날카로운 경고음이 심심찮게 도시를 긴장시키고 있다. 그만큼 급하고 예민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위험하게 추월하는 자동차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오랜 습관이어서 그런 것인지 다행히 골목길 자동차에 양보하는 행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지만 전과 같지는 않다. 관찰자의 눈에는 오랜 습관이 환경 변화의 압박에 밀려 떠내려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 당국이 혼잡통행료를 도입할지 여부에 대해 논의할 정도이니 케임브리지의 혼잡도가 대도시 뺨치는 수준이 됐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아직은 서울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케임브리지에 오면 나도 열심히 양보를 한다. 두드러진 변화가 아쉬워서 그런 것인지 케임브리지의 사람들보다 어쩌면 더 열심히 양보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면서 양보는 줄어들고 경적 소리는 더 자주, 더 크게 울려 퍼질 것 같다.
10년 후 케임브리지의 도로 풍경은 어떻게 될지, 관찰자의 마음에 아쉬움이 고인다. 꼭 남의 얘기만도 아니라는 것이 심사를 더 무겁게 한다. 케임브리지에서도 ‘글로벌스탠더드’는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