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케임브리지 하고도 외곽으로 30분 정도 나가서 있는 작은 마을의 평범한 식당. 그곳 메뉴판에서 한국 음식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케임브리지에서 친구와 함께 근교로 나가보자는 얘기를 하며 특별한 계획 없이 찾아간 식당이었다. 물론 요즘 흔히 이용하는 음식점 앱을 잠깐 뒤졌고 리뷰가 괜찮은 곳을 고르기는 했다. 시 주변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작은 마을 중 하나에 있는 이른바 동네 식당이었다.
식당 안에 동양인은 나와 나의 친구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노인들이 여럿 있었고 주로 마을 사람들이 찾는 동네 식당인 것은 분명했다. 듬성듬성 비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식당이었다.
정식 메뉴판 외에 식탁 위에는 간단한 점심 특선을 소개한 약식 메뉴가 또 하나 있었다.
‘KFC?’
‘여기는 식당에서 켄터키프라이드치킨을 파나?’
리뷰도 괜찮은 곳인데,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점심 특선 4가지 중 하나가 KFC, 그것이 바로 Korean Fried Cauliflower Wings이었다.
'아니, 이런 곳에 Korean Fried가 있네.’
내심 놀랐다.
“이 사람들이 Korean Fried가 무엇인지 알고 요리를 하는 것일까?”
친구에게 물었다. 사실 Korean Fried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 튀김인지 우리도 몰랐다. 음식은 튀긴 콜리플라워에 매운 소스(Sriracha: 태국 원산)를 뿌리고 김치(Kimchi)를 샐러드 비슷하게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채식 전용 음식이었다.
Korean Fried도 뜻밖이지만 김치가 있어야 한국음식이라는 것을 이들이 안다는 것도 신기했다. 튀김이 한국식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김치를 주기 때문에 한국음식이라는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음식의 제목은 ‘Korean Fried’였다. ‘Korean’에 잠깐 관심이 갔으나 짐작하기 어려운 콜리플라워 튀김은 별로 당기지 않았다.
종업원이 주고 간 정식 메뉴판으로 눈길을 옮겼다.
“어, 여기 정식 메뉴판에도 또 Korean이 있네.”
친구가 말했다. 나는 또 한 번 의외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고기 완자(Korean Meatball)였다. 다양한 나라의 고기 완자가 있지만 영국인들이 이해하는 한국의 완자는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아, 역시 고추장(Gochujang)이었다.’
완자야 특별할 것이 없지만 고추장 양념으로 가볍게 조린다는 것이 Korean을 의미하는 내용이었다. 고추장의 맵기가 다소 부담스러웠던지 색깔이 비슷한 토마토를 섞어 강도를 낮춘 현지화 양념이었다. 그것을 빵에 얹어 먹는 음식이었다.
Korean이니까 여기에도 당연히 김치가 다른 야채와 함께 딸려 나온다. 김치는 한국음식과 달리 잘게 채(Slaw)로 썰어 샐러드처럼 제공된다. 흡사 동구국가에서 즐겨 먹는 절인 야채와 같은 모양인데 김치를 이와 비슷한 범주의 숙성 야채로 보고 자신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내놓는 것 같았다.
점심 특선 메뉴가 이미 익숙해진 남아시아의 매운맛에 김치를 곁들인 약식 Korean이라면, 정식 메뉴는 고추장으로 한국의 맛을 낸 본격 Korean이라고 할 수 있다.
“인기 있는 메뉴 중의 하나.”라고 종업원이 설명해 준다.
음식 백화점도 아니고 종류가 많지도 않은 시골 식당에 Korean 메뉴가 두 개씩이나 있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희한했다.
‘무슨 바람을 타고 어떤 정보가 이 시골까지 날아와 메뉴판에 내려 않았을까? 혹시 이들은 Korea는 모르고 Korean Food라는 새로운 음식 종류만 아는 것은 아닐까?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남쪽이냐 북쪽이냐를 묻던 사람들이 그 사이에 한국을 잘 알게 됐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바람은 대도시인 런던에도 불고 있었다. 한국 식당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최근의 새로운 현상은 전형적인 영국 식당에 마치 그 시골 식당처럼 정체불명의 Korean Menu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사람은 물론 세계 각국의 방문객들도 자주 들르는 런던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 그곳의 T.rex Restaurant. 크기도 크기이지만 관람객들이 즐겨 찾는 공룡 전시실에 이어져 있어 박물관 안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당이다.
이곳의 메뉴에 Korean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Pulled Pork이다. 제목만 보고는 바로 상상이 가지 않는 Korean이었다. Pulled Pork는 이른바 슬로 푸드로 돼지고기를 훈제로 익혀 뜯듯이 잘게 찢어 낸 것이다.
한국음식에 이와 비슷한 것은 없었다. 음식 소개는 간단하게 Korean BBQ Pork이다. 양념에 대한 설명이 달리 없다는 것은 고객들이 Korean BBQ Pork의 맛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런던이 국제도시이다 보니 케임브리지 인근의 시골과는 달리 이미 Korean이 익숙해져 있나 보다.’ 생각하게 됐다.
Korean BBQ Pork는 영국에서 고추장이나 간장 참기름 양념으로 간을 한 돼지고기를 보통 말한다. 자연사박물관의 Korean은 뜯어낸 돼지고기를 이 양념에 버무려 빵과 함께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그 음식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슬로 푸드에 한국식 양념을 결합한 퓨전 한국음식(영국 음식)인 셈이다. 이 식당에는 그 음식과 함께 김치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시큼한 샐러드류를 함께 내놓는다는 설명만 있었다. 이 정도이면 어쩌면 그 속에 김치가 함께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점심을 먹은 이후여서 영국인의 한식 솜씨를 음미해 보지는 못했다. 다음에 가게 되면 꼭 한번 시도해 보리라 기억의 단추를 눌러 놓았다.
오래전 배낭여행을 다니던 시절에 친구 하나가 식빵에 고추장을 발라 먹고 다녔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밥을 하지 않아도 되고 느끼하지도 않고, 간단하게 때우기에는 아주 그만.”이라고 그는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그것 참 창의적 조합.’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양복 입고 짚신 신은 형국.”이라고 말하며 함께 웃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영국인들이 양복을 입고 열심히 짚신을 찾아 신고 다니는 것 같았다.
고추장과 김치는 Korean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음식이 된 것 같다. 둘 다 기본적인 음식이지만 특히 고추장과 같은 기본양념이 대표의 하나가 된 것은 큰 잠재력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리라. 고추장은 일반 음식이라기보다 양념에 속하는 것이어서 다양한 음식에 가미할 수 있다. 시골과 런던의 영국 식당에서 본 것처럼 그만큼 Korean 음식의 확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주 짧은 시간에 한국의 음식이 날개를 달게 된 것 같다. 국제적인 대도시뿐 아니라 영국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도 한국의 맛은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다. 한국보다 한국의 맛을 먼저 알게 되는 인구가 적지 않을 것 같다. 한국 음식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 곳곳에서 그들의 방식으로 다양한 변주를 전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