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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ssy Aug 21. 2024

쓰러졌는데 못 일어나면 어떡하죠?

트리플 에스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트리플 에스의 <Girls never die> 뮤직비디오 중 한 장면이다.


어느 날 친한 직장 동료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날 힘이 없으면 어떡하죠?”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쓰러졌으면 그냥 일어나면 되지 않을까, 이런 쉽고 가벼운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면 그냥 도망갈까요?”


우리는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서 몇 번이고 고비에 맞서서 싸우라는 말을 듣는다. 트리플 에스의 <Girls never die> 곡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시 해보자.”

“끝까지 가볼래 포기는 안 할래 난”

“쓰러져도 일어나.”

이 말을 들으면 힘이 나야 하는데 나는 이상하게 더 무기력해진다. 나는 다시 일어날 힘조차 없어서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어떡하지. 그대로 패배자가 되어버리는 건가?


‘네버 다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건 어린 소녀들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네버 다이’를 외쳤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신을 불사의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삶은 “죽음충동”의 전형에 가까우며, “자기의 삶을 러시안룰렛처럼 다뤘고 파국을 향해 달려들어 그것을 돌파하고자 했다. “ 실제로 그는 1차 세계대전에서 포탄에 맞고도 살아났던 경험이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비정한 세계에서 맞서 싸워야 하고, 환멸 속에서도 살아남”는 ‘하드보일드’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심지어 그가 쓴 단편의 제목은 <불패자>이기도 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왜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일까?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어머니의 엄격한 훈육 아래에서 자랐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반감을 가졌으며, 어머니에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어머니의 성악 수업을 듣는 루스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헤밍웨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집에 들어앉아 수업을 듣는 루스를 못마땅해했다. 아버지가 루스를 내쫓기를 원하자 헤밍웨이의 어머니는 루스가 생활할 수 있는 별채를 지어 그에게 대항한다. 시간이 흘러, 헤밍웨이의 아버지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이후 헤밍웨이는 자신의 어머니와 연을 끊게 된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어머니를 “양성애자”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유년기는 불행했으며, 그의 선천적인 섬세함과 유약함을 받아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의 글은 어느 누구보다 강하지만 실제 그의 삶은 외롭기만 했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속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마음이 상처를 입기 전에 먼저 관계를 끊어버릴 때도 있었다. 고독하고 외롭고, 여린 삶이었다. 그의 삶을 들여보고 나서 그의 글이 모순되었다고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우리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같이 나의 삶과는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하지만, 누구보다 강하다고 이야기한다. 왜 우리는 쓰러지지 못하는 걸까? 그 이유는 쓰러짐을 용납하지 않았던 과거와, 쓰러진 이에게 ‘패배자’라는 낙인을 찍는 사회에 있다고 생각한다.


헤밍웨이의 과거는 ‘억압’과 ‘불안’이었다. 어린 시절에 아주 엄격한 부모 밑에서, 심지어 부모 간의 관계가 좋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알 것이다. 아이들은 내가 잘못하면 나의 가정은 망가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떤다. 부모는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며 나의 빈틈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빈틈을 찾아내면 마치 화풀이를 하듯,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분노한다. 예민한 부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아이는 자기 자신을 감시한다. 그리고 부모를 벗어나서도 내면화되어 버린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는 자신의 내면에 또 다른 부모를 스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다 커버린 아이는 스스로에게 계속 되뇐다. 완벽해져야 한다고, 쓰러지면 안 된다고, 쓰러지지 말자고.

사랑받고 싶었던 부모는 이제 곁에 없다. 누구를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거니?


쓰러진 이들에게는 “다시 일어나”라는 독촉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자신이 ‘쓰러졌다’는 것을 인식할 시간이 필요하다. 어린아이인 채로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들은 자신을 완벽하고 강인해 보이게 애쓰느라 내면이 다 쓰러진 것도 모른다. 그들에게 쓰러지면 안 된다는 말보다 쓰러져도 괜찮다는 말을 건네자. 그리고 그들이 일어날 힘을 기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자. 사람은 스프링이 아니라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한다. 관절을 쓰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 천천히 일어나도 괜찮다. 너는 스프링이 아니다. 완벽하게 일어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무리하지 말아라. 시간이 들어도, 완벽하지 않아도 다 괜찮다.


강해질 필요 없다.

약해져도 괜찮다.

너는 너 있는 그대로, 살아있는 그대로, 쓰러져도 괜찮다.


내가 외로운 헤밍웨이와, 어린 소녀인 아이돌 가수와, 쓰러진 채로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참고 문헌>

<평균의 마음> 이수은, 메멘토,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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