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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의자

아웃사이더지만 괜찮아 2

by Rani Ko


외로웠던 아이는 친구를 많이 갖지 않았지만,
대신 책 한 권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읽기 독립이 이루어진 뒤부터였다. 글자를 하나하나 더듬지 않아도 문장이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자, 책은 단순한 읽을거리를 넘어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외로웠던 소녀였던 나는 그때부터 급속도로 책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말이 많은 아이가 아니었다.
말보다 생각이 먼저였고, 생각이 많았던 만큼 말은 늘 신중했다. 성격은 내성적이었고, 먼저 다가가 관계를 넓히는 쪽도 아니었다.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럿과 두루 어울리기보다는 한두 명과 깊이 지내는 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친구의 수보다 관계의 밀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기질이 이미 그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어울리기보다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였다. 하지만 집이라고 해서 늘 사람이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오빠는 나와 달리 외향적인 성향이라 놀이터나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아래 동생은 나이 차이가 제법 나 아직 함께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어렸다. 엄마는 아이 셋과 집안 살림으로 늘 바빴고, 아빠는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느라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그 시절의 아빠들이 대체로 그러했듯, 바깥일에 몰두하셨고 집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러한 나의 성격과 기질, 그리고 환경이 겹쳐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아이가 되었다.





그 시간을 채워준 것이 책이었다.


세 살 터울의 오빠를 위해 집에 들여놓은 전집들이 자연스럽게 내 차지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전집이 하나의 문화처럼 유행하던 시절이었고, 세계 명작 동화 전집, 세계 위인 전집, 한국사와 세계사, 백과사전까지—한 질, 두 질쯤 없는 집이 드물 정도였다. 우리 집 거실 한쪽 벽도 늘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가리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머물렀던 것은 세계 명작 전집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그림이 거의 없는 줄글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나는 점점 현실에 있을 법한 나와 닮은 주인공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처럼 마법이 일어나거나 갑자기 신분이 바뀌는 이야기보다는, 실제로 어딘가에 살고 있을 법한 소녀들이 중심에 선 이야기들을 더 선호하였던 것이다.


그 시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소공녀**였다. 공주처럼 자라던 아이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하루아침에 차디찬 현실에 놓이게 되지만,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삶의 태도를 지켜내는 이야기. 마지막에 아버지의 친구를 통해 구원을 받는 결말은 지금 생각하면 다소 극적이지만, 어린 나에게는 행복감을 주는 분명한 해피엔딩이었다. 세상은 잔인할 수 있지만, 삶은 다시 손을 내밀 수 있다는 믿음은 그 시절의 나에게 깊은 위안과 희망이 되었다.


그다음으로 깊이 빠져들었던 책은 **빨강머리 앤**이었다. 당시의 나는 이 이야기가 한 권으로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더 커서 앤 시리즈가 모두 10권이라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았다). 주근깨가 많고 머리가 붉은, 상상력이 유난히 풍부한 소녀 앤이 마릴라와 매슈 남매의 집에 오게 되면서 겪는 일들. 그 속에는 우정이 있었고, 새로운 가족이라는 이름의 관계가 있었으며, 세상에 적응해 가는 한 아이의 시간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특별하지 않아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도 않은 그 아이의 시선은, 나에게도 오래도록 잔잔한 감동을 남겼다.


이렇게 명작 전집 가운데에서도 내가 특히나 좋아했던 작품들은 대체로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돌멩이 수프**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환상보다는 인간의 선택과 태도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래서 막연하고 화려한 동화보다는, 조금은 냉정하고 현실적인 서사에 더 마음이 갔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이미, 그런 이야기들에 더 깊이 공감하고 오래 머무를 수 있었다.




그 모든 독서는 늘 같은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남향 거실 한 편에 놓인 대나무 흔들의자에서 말이다.


특히 길고 긴 겨울방학 동안, 그 흔들의자는 나만의 전용 자석이 되었다. 낮에 햇빛이 포근하게 흔들의자를 비추면, 아홉 살의 나는 책을 펼친 채 깊이 몰입해 읽어 내려갔다. 책을 손에 든 채로 잠들었다가, 잠에서 깨면 다시 그 자리에서 책을 이어 읽었다. 햇빛이 비출때면 나의 까만 머리카락과 속눈썹을 부드럽게 감싸주어 항상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당시 마른 편이었던 나는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흔들의자가 앞뒤로 크게 흔들릴 정도였으나, 그 움직임마저도 이상하게 정적인 장면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지만, 그 자리만큼은 세상과 분리된 채 고요하게 멈춰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 앉아 책을 통해서 나는 밖을 직접 돌아다니지 않고도 나만의 세상을 더 크고 깊게 넓히고 있었다. 나는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며, 문장과 상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그런 아이였다. 흔들의자는 나를 세상으로 움직이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잠시 멈추게 했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 있는 법이 아니라 혼자여도 무너지지 않는 법을 책을 통해 배우고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런 자리가 있었을까?
어릴 적 유난히 오래 머물던 장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던 작은 아지트, 책이나 글과 함께 처음 자신을 발견했던 순간 말이다. 어쩌면 작가의 기질은, 그렇게 조용한 자리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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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는아이 #작가의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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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차 현직 초등교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 글쓰기를 통해 또 한 번의 성장을 꿈꿉니다. 교육대학교 졸업 및 동 대학원 수료. 2025 브런치 "작가의 꿈 100인"에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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