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지만 괜찮아 1
할머니 집은 3층짜리 양옥이었다. 집 뒤편에는 작은 동산이 있었고 오빠와 나는 주로 그 곳에서 뛰어놀았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아빠, 엄마와 함께 바다가 보이는 지방으로 이사가게 된다. 바다를 매꿔 땅으로 만든 곳에 지은 아파트 단지라고 했다. 우리집은 하얀색과 파란색의 페인트로 칠한 동 제일 꼭대기 층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 올라가야 했다. 복도식 아파트여서 12가구가 일열로 죽 줄을 서 있었고 그 중에서 가운데 쯤 위치한 집이었다.
그 때만해도 동생이 없을 때였고 방이 3개여서 나도 내 방이 생겼다. 방 중에서 제일 작은 방이었지만 그래서 더 아늑했다. 아직 입학 전이었기에 책상은 없었고 책장과 피아노, 옷장이 있었고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다. 비록 복도로 난 창문이었지만 엄마는 커튼도 달아주셨다. 딸방이라고 오빠방과 다르게 다홍색이 들어간 커텐이었다.
"자, 라니야. 어떠냐. 여기가 네 방이야. 마음에 드니?"
아빠와 엄마는 내가 처음으로 그 곳에 간 날 직접 내 방을 소개시켜 주셨다.
너무 예전 일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난 처음가진 내 방이 마음에 쏙 들었었다. 아직 어려 혼자 자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두려워 잘 때는 커다란 곰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잤다. 인공의 고동색 털이었고 꽤 많은 먼지가 쌓여서 알러지와 비염이 있었던 나는 그 인형 덕분에 끊임없이 재채기와 콧물, 눈물을 흘렸지만 그럼에도 그걸 꼭 끌어안고 잤다. 아직은 혼자 잠들기 무서웠던 소녀의 유일한 애착 인형이었다.
엄마는 내가 잠들기 전까지 내 옆에서 이야기를 해주시거나 책을 읽어주셨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전래 동화였다. 대부분 권선징악의 결말로 끝나는 게 마음에 들었었다. 엄마는 내가 잠들고서야 나가신 적도 있었지만 어떤 날은 내가 잠든 척 했을 때 나가신 적도 많았다.
엄마가 방문을 조용히 닫고 가시면 나는 그제야 감았던 눈을 살포시 떴다. 베개에 가지런히 머리를 누인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내 작은 방 천장에 이야기 주인공들을 꺼내놓고 마음껏 그렸다 지웠다.
"어서 나와, 얘들아."
어둠 속에서 나만의 주인공들을 살포시 불러 깨웠다.
주인공은 콩쥐가 되어 눈물 흘리는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홍길동이 온 방안을 휘젓고 마음껏 날아다니기도 했다. 난 꼭 이야기에 나온 결말대로 마지막을 만들지는 않았다. 주인공들은 커튼 사이를 뚫고 들어온 희미한 불빛 조명 속에서 전혀 다른 최후를 맞기도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은 없애거나 변형시키기 일쑤였다.
그 시절의 나는 사람들 사이보다는 이야기 속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는 아이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 시간은 늘 상상으로 채워졌다.
할머니와 삼촌들, 고모들까지 함께 살던 집을 떠나 처음으로 네 식구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늘 바빴고, 엄마는 나에게 낯설고 어려운 존재였다. 다정했지만 조심스러웠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어디까지 다가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빠는 나와 너무 달랐다. 같은 집에 있어도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그렇게 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 채 혼자가 되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 방은 그렇게 나에게 첫 작업실이자 힐링의 장소였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던 아이가, 조용히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보던 곳.
외로운 아웃사이더였지만, 그 시절의 나는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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