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에 두고 온 나의 다이애나

아웃사이더지만 괜찮아 6

by Rani Ko

모두가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하며 낱장의 책장 넘기듯 빠르게 변해가던 1990년대 초반. 나는 한국 나이로 열세 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어느 반에나 ‘원지’ 같은 아이는 있기 마련이다. 6학년이 되어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연주(가명)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열혈 팬이었던 연주를 중심으로 반의 주류 팬덤이 형성될 때, 그 거센 흐름에서 빗겨난 아이들이 있었다. 관심사도, 성격도 조금씩 결이 달랐던 나와 보람, 수미, 그리고 현정이. 우리는 특별한 선언 없이도 조용히 하나의 섬이 되었다.



주로 보람, 수미와 셋이서 시간을 보냈다. 방과 후면 서로의 집을 오가며 숙제를 하고, 가끔은 아무 목적 없이 서점에 들러 책장 사이를 서성였다. 지금도 기억 한편에 또렷이 인화되어 있는 장면들이 있다. 어린이날 장애 어린이 보육원에서 함께 봉사했던 오후, 그리고 어느 무더운 여름날 보람이 어머니의 차를 얻어 타고 보수동 책방 골목을 하루 종일 걷던 기억들.



그 시절의 나는 세상의 중심에서 한 발쯤 비껴 서 있었지만, 그 덕분에 ‘친구’라는 이름의 온기를 가장 가까이서 배우고 있었다.

보수동, 보물창고에서 발견한 앤의 생애 당시 보수동 책방 골목은 헌책방의 메카였다. 주머니 가벼운 고시생과 연세 지긋한 어른들 틈에서, 우리 같은 꼬마 손님들도 부지런히 보물을 찾았다. 온라인 마켓이 없던 시절, 쇼핑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취미이자 탐험이었다.

사실 우리 집에서 보수동은 꽤 먼 거리였다. 직통 버스도 없어 날을 잡아야 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외향적이고 활달했던 보람이는 늘 우리를 그 먼 길로 이끌었다. 나와 정반대의 성격이었던 보람이와 함께 있을 때 유독 마음이 편안했던 건, 아마도 우리가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는 ‘다름’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보물창고 같은 골목에서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빨강머리 앤>이 단권이 아닌, 열 권에 달하는 긴 연재소설이라는 사실을. 루시 M. 몽고메리는 앤이 자라 길버트와 결혼하고,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되어 늙어가는 생의 전 과정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앤 시리즈 전권을 가슴 가득 안고 돌아오던 길, 나는 세상 누구보다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보람이는 <유리가면>과 <캔디캔디> 시리즈를 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책을 맞바꾸어 읽었다. 앤의 초록 지붕 집과 캔디의 눈물이 뒤섞인 그 여름, 우리들의 방은 에드워드 섬이 되었다가 이름 모를 만화 속 무대가 되기도 했다. 워킹맘이었던 보람이 어머니가 차려주신 치킨과 피자가 있던 생일 파티의 달콤함까지. 보람이는 내게 정말로, 둘도 없는 ‘다이애나’였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Rani Ko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20년 차 현직 초등교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 글쓰기를 통해 또 한 번의 성장을 꿈꿉니다. 교육대학교 졸업 및 동 대학원 수료. 2025 브런치 "작가의 꿈 100인"에 선정.

340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6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43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5화말하지 못한 열두 살의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