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기름 그녀
그녀는 마치 고도로 딥 러닝 된 AI 같았다.
신입사원인 내가 A를 물어보면, A에 파생되는 B, C의해결방안까지 비엔나소시지 마냥 줄줄이 엮여 나왔다.그녀의 방대한 업무 지식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나는 금붕어가 된 것처럼 입 대신 눈만 꿈뻑꿈뻑 댈 뿐이었다.
그녀와 내가 친해지게 된 계기는 ‘전어’였다.
맞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 제철 음식. 나는 전어의 맛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그 의미를 좋아한다. 내게 전어는 가을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몇 년도인지 모르는 가을의 어느 날 퇴근 무렵.
유독 힘들어 보이는 그녀에게 “전어에 술 한잔 할까요?”라고 제안했다. 그간 업무적인 관계였기에 지금 생각해 봐도 뜬금없는 일이었다. 아마 가을밤이 주는 정취가 마법을 부린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오래전의 일이라 나눴던 대화, 음식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가을밤과 더불어 서정적이고 정감 있던 분위기만은 생생하다. 그날 밤 함께 있었던 작은 술집, 박장대소하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버터가 녹는 것처럼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두 명의 여자. 그 장면이 누가 찍어준 아날로그 느낌의 오래된 사진처럼 머릿속에 남아있다.
20년 가까이 된 그 사진을 나는 몹시도 사랑한다.
연애 초기의 남녀처럼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일주일이 7일이라면 일곱 번을 만날 정도로 쿵작이 잘 맞았다. 한 번은 둘 다 통기타에 빠져서 충동적으로 학원에 등록했다. 하필 학원이 유흥가 주변에 있어서 한 번은 내가, 또 다른 한 번은 그녀가 “오늘은 너무 힘들었어.. 아무래도 한잔 해야 할 것 같아” 라며 질세라
서로 수업을 빠지기 일쑤였다.
술자리를 좋아하던 우리는(비록 흑역사 제조기들이었지만) 젊었고, 회사에 대한 애정이 극진했고
그래서 슬펐고, 모든 것이 찬란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수많은 봄밤, 여름밤, 가을밤, 겨울밤을 기억한다.
봄에는 주꾸미를, 여름에는 치맥을, 가을에는 전어를, 겨울에는 과메기를 먹으면서 마음과 시간을 나눠 가졌다.
그녀와 함께 했던 세상의 모든 기념일을 기억한다.
크리스마스이브, 첫눈 오는 날,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생일, 연말, 연초에 서로를 응원했고 위로했다.
그녀를 알고 지낸 지 20년이 지났다.
결혼과 출산, 지금은 거리상의 문제 때문에 1년에 몇 번만나지 못한다. (이 관계의 정의가 달라질까 봐 염려된다.)
그럼에도 말하고 싶다.
나의 뮤즈이자 소울메이트로 자리 잡은 그녀에게
서로의 젊은 날을 공유하고 있는 그녀에게
앞으로도 같이 예쁘게 늙어가요. 그리고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