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80년대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격동의 시기로 기억된다. 영화 서울의 봄의 배경이 된 12·12 사태 이후 전두환 정권이 출범했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을 보여주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은 국민적 스포츠 붐을 일으켰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대한민국은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나에게 다소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80년대생으로서 그 시기의 역사를 피부로 느낄 만큼 나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80년대에는 매년 약 60만명이 태어났고, 출산율은 2명에 근접했다. 그러나 70년대생을 대표하는 X세대나 최근 주목받는 MZ세대(90년대생과 2000년대생)와 달리, 80년대생은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 세대로 불리지 않았다. 가끔 Y세대라 불리긴 했지만, 이마저도 어딘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 세대는 그만큼 모호한 존재로 남아 있는 건 아닐까.
혼란스러운 사회를 지나 유년기를 보냈던 90년대 학창 시절에 접어들며, 우리는 조금씩 변화의 바람을 느끼기 시작했다. 군사 정권의 잔재였던 교련 과목은 군사 훈련 대신 응급처치 교육으로 바뀌었고, 체벌이 일상적이던 학교에서는 갑작스럽게 체벌 대신 벌점 제도가 도입되었다. 말만 '자율'이라는 이름의 야간 자율학습도 점차 사라지며, 학교 현장에도 민주화의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입학했지만, 졸업 즈음에는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는 등 교육 제도의 변화도 자연스레 겪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학원과 과외로 이어지는 치열한 입시 경쟁은 여전히 우리 세대의 숙명처럼 따라다녔다.
수능이라는 새로운 시험 제도를 맞이했을 때, 우리는 언론에서 단군 이래 최저 학력 세대라는 낙인이 찍히며 ‘이해찬 세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체벌 제한 조치, 야간 자율학습 폐지, 연합고사 폐지는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낸 이해찬의 주도로 이루어진 정책이었다. 우리의 학창 시절을 바꾼 변화는 결국 그가 추진한 개혁의 결과였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혼란스럽고 과도기적인 세대의 운명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80년대생으로서 우리는 반공교육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은 매우 형식적이고 모호했다. 학창 시절 반공교육은 주로 6·25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거나, 가끔 상공에서 뿌려지던 삐라를 학교에 가져가 학용품으로 바꿔주는 경험 정도로 체감되었다. 가장 흔한 활동은 반공 포스터를 그리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단순히 “공산주의는 나쁘다”는 메시지를 반복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공산주의의 실체에 대해 배우거나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일은 드물었고, 그 의미가 우리 일상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실감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러던 중 1994년,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 전후로 하여 한반도에는 긴장감이 다시 감돌았다. 당시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전쟁을 위협하며 한국 사회에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사재기 현상이 일어나고, 전쟁의 공포가 잠시나마 일상을 뒤덮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당시의 위협은 현실화되지 않았고, 현재 북한의 도발 발언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는 상황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과거의 전쟁 공포를 떠올리며 과잉 반응했던 그 시절이 어쩐지 우스워지기도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반일감정 역시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경험으로 남았다.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주로 부모님 세대나 형, 누나를 가진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졌다. 독립기념관, 서대문형무소와 같은 일제강점기의 흔적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와 전쟁의 상흔을 강조하는 어른들의 말은 자연스레 일본에 대한 거리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곧 현실과 충돌했다.
어린 시절 일본의 학용품은 친구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예쁜 디자인의 펜과 공책, 워크맨과 CD플레이어 같은 일본산 전자제품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품질’로 인식되었다. 막연히 부정적 감정을 품었던 나라에서 만들어진 제품들이 현실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의 손에 들린 소니 워크맨이나 컴팩트하고 선명한 음질의 MD와 CD플레이어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반일감정은 어느새 감탄으로 뒤섞였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은 스포츠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특히 축구 국가대표팀의 한일전에서 일본에게 패할 때마다 감독이 경질되던 시절은, 반일감정이 스포츠와 결합되어 극명하게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한일전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 국가의 자존심과 감정이 얽힌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졌다. 일본에 패하면 그 책임이 온전히 감독에게 돌아갔고, 그의 경질은 마치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상징적인 행동처럼 비춰졌다.
반공과 반일이라는 두 가지 정서 속에서 자랐지만, 그 내용은 점점 희미해지고 실질적인 체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른들로부터 들은 과거의 기억과 현실에서 경험한 일본 제품의 우수함 사이의 괴리,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단순한 혐오와 실체를 모르는 추상적인 공포 사이에서 우리는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은 세대를 관통하는 정체성의 모호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우리는 과거의 이념과 현실의 변화를 동시에 마주한, 애매함 속에서 성장한 세대였던 것이다.
80년대생의 성장 배경에는 경제위기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중학생 시절, 갑작스럽게 닥친 IMF 외환위기는 우리 삶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우그룹과 한보철강 같은 대기업이 잇달아 도산하며, "대기업에 들어가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부모님 세대의 불안감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졌고,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공무원이나 공기업처럼 특별한 직종에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시절, 취업은 어렵고 생존은 치열하다는 고정관념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이후 군 복무 시절은 경제적 어려움을 실감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당시 병사들의 월급은 고작 2만~4만 원 남짓으로, 이 돈으로 간단한 간식 하나 사기도 어려웠다. 군대 내에서는 경제활동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월급의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은 현실의 냉혹함을 더욱 실감하게 했다. 우리는 공짜에 가까운 수준의 월급으로 국가로부터 시달리며, 그저 살아남기 위해 자원을 아끼고 최소한의 만족을 찾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대학생 시절에도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는 필수였지만, 최저임금은 그야말로 명목상의 기준에 불과했다. 사장님들은 최저임금을 무시하거나 턱없이 낮은 임금을 지급했으며, 한 달 열심히 일해도 50만 원이 채 안 되는 수입으로 버텨야 했다. "학생이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던 시절, 노동의 가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대학교 졸업 즈음에 찾아온 미국의 리먼브라더스 사태는 취업 시장에 또 한 번의 찬물을 끼얹었다. 대기업 취업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공무원이나 공기업 같은 안정적인 일자리는 많은 청년들의 희망이 되었지만, 그마저도 경쟁은 치열했다. 취업난은 끝없이 이어졌고, 많은 이들이 고용 불안정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경제위기와 저임금, 취업난 속에서 80년대생은 끊임없이 적응해야 했다. IMF와 리먼브라더스 사태 같은 굵직한 위기를 겪으며 무너진 신화를 목격했고, 각자도생의 현실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다.
내 주변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많다.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고 살아가는 친구들도 적지 않다. 우리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결혼과 출산의 선택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결혼과 출산이 당연한 삶의 과정으로 여겨졌지만, 80년대생부터 이러한 인식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통계를 보면, 1970년 출생 코호트의 남성 미혼율은 16.4%, 여성 미혼율은 7.2%에 불과했으나, 현재 시점으로 결혼적령기가 훌쩍 넘어간 1980년 출생 코호트의 남성 미혼율은 30.4%, 여성 미혼율은 17.3%, 1985년 코호트에서는 각각 46.5%와 29.1%로 급격히 상승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결혼에 대한 개인적 선택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요인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고용 불안정, 높은 주거비, 그리고 더 나은 개인의 삶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80년대생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결혼과 출산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우리 세대를 과거와 구별짓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결혼과 출산의 기준이 바뀐 이 시대, 80년대생은 전통적인 틀을 넘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이 변화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개개인의 삶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80년대생들이라면 이 모든 상황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어떤 세대는 보릿고개의 고통을, 어떤 세대는 민주화의 격변을, 또 다른 세대는 물질적 풍요를 경험했다면, 80년대생은 경제적 위기와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다.
지금의 80년대생은 가족을 꾸리거나 혼자 살아가며, 여전히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점점 더 조용히 자신만의 자리를 지켜가는 중이다. 세대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지만, 누구보다 현실에 충실한 세대.
그리고 그 과정을 돌아보며 우리 80년대생을 대표하는 한마디 문장으로 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