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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Oct 17. 2024

단편소설, 오류(五柳)선생 표류기(5)

학교를 버린 아이

 ‘학생에게 영향을 받는 교사는 이미 교사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이다. 자격을 잃은 것이다. 잃은 것이다. 것이다.’ 어디선가 낮고 잔잔한 목소리가 이명(耳鳴)처럼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느닷없이 그의 주먹이 정해진의 얼굴 양쪽에 마구 떨어졌다. 정해진의 왼쪽 귓불이 찢어지면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정해진은 비슥하게 선 채로 웃고 있었다. 앞에 앉아있던 아이 두 명이 일어나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선생님, 참으세요.”

정해진의 얼굴이 금세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보건실로 가자.”

반장이 일어나 정해진을 부축했다. 그러나 정해진은 반장의 팔을 뿌리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는 밭은 숨을 몰아쉬며 교실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운동장 가의 등나무 꽃향기를 흩뿌리며 다가왔다. 교정 울타리 끝에 서 있는 버드나무 두 그루가 멀리 바라다보였다.

 ‘그래. 이놈아. 나는 네가 부럽다.’

 교실 안은 별 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했다. 정해진은 말없이 고갤 숙이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 정해진의 귓불에 밴드를 감아 준 모양이었다. 아이들 보기에 민망했던지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정해진은 잘못이 없다. 해진이를 이상하게 보지 마라."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그들은 이 사태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전혀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정해진의 답란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만 가늠해 볼 뿐이었다.

 “자, 시험지 정답 풀어보자.”

 여느 때처럼 문제 풀이가 진행되었다. 객관식 8번을 지나 9번 문제의 답이 불려졌다. 그때, 조용하던 교실이 다소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반장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선생님. 9번 문제 답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은데요. 답이 두 개 아닌가요?”

여기저기서 반장의 말에 동조하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갑자기 그의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이번 시험문제에서도 또 오류가 난 것이 분명했다.

 저녁나절의 양유정은 한산했다. 노인들 서넛이 장기를 두고 있었고 엄마와 함께 굴렁쇠를 굴리는 아이 하나가 연신 까르르 웃고 있었다. 하천을 복개한 도로의 배수구 틈 사이로 시큼한 음식 썩는 냄새가 풍겨 올라왔다. 큰길 모퉁이 왼쪽으로 희정다방 간판이 보였다. 다방 안은 매우 좁아서 테이블 네 개가 전부였는데 천으로 만들어진 소파들이 누렇게 바래 보였다. 그가 들어오는 걸 보고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내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김 선생이슈? 내가 정해진이 애비 되는 사람이우.”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온 두툼한 체구의 사내였는데 나이는 그의 연배 정도 됨직해 보였다. 전화 속에서 느껴지던 인상과는 다르게 눈매가 사뭇 부드럽고 편안했지만 어딘가 묘하게 상대를 압도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예. 처음 뵙겠습니다. 해진이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김도진입니다.”

 “아까는 초면에 전화로 실례가 많았소. 얼굴이 온통 일그러져 들어왔길래 갑자기 욱해서 해 본 소리요. 사실 그놈은 좀 맞아야 싼 놈이오.”

 “아닙니다. 제가 좀 과했습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실, 아까 첨에 전화로 했던 말은 사실이었소. 난 울화가 치밀면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는 성미요. 그런 나를 오늘은 아들놈이 말렸던 거요.”

 “해진이가 뭐라고 하던가요?”

 “얼굴을 온통 왕텡이 쏘인 것처럼 하고 들어오길래 냅다 어느 놈이냐고 캐물었더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맞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합디다. 뭐라더라? 우울한 오류선생?”

그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해진이 끝까지 그를 우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화가 뻗쳐올랐다.

 “해진이는 무서운 아입니다. 저도 교단에서 근 삼십년을 보내고 있지만 그런 애는 처음 봤습니다. 교과 내용을 가르칠 때 더러는 선생들이 실수할 때가 있어서 공부 깨나 한다는 아이들에게 책잡히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 건 흔한 일입니다. 삼십여 년이 흐르는 사이, 무수한 아이들을 가르쳐 내 보냈지만 아무리 뛰어난 아이라도 저보다 낫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해진이, 이 아이는 아닙니다.”

 다방 유리창으로 저녁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해진이 아버지와 그는 한동안 햇살을 바라보면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김선생을 잘 모릅니다만, 해진이가 내게 들려주었던 김선생에 관한 이야기가 무얼 의미하는지 대충은 짐작이 가오.”

 다방 안으로 길게 드리워진 햇살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그는 정해진의 아버지를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어렵게 큰 아이요. 나는 그 아이를 보면서 세상엔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소. 어찌하면 좋겠소. 김선생.”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깥은 슬슬 초저녁 기운이 내려앉는 중이었다.

 “그만 두게 해야 합니다. 학교를 당장 그만 두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냥 놔두면… 학교가 그 아일 죽일지도 모릅니다. 학교는 이미…….”

 정해진의 답지가 어른거렸다. 가슴이 거북했다. 손바닥으로 심장 쪽 가슴을 지그시 문질렀다. 상의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사직서의 감촉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학교를 당장 그만 둬야 합니다. 그냥 놔두면…….”

그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노을이 붉다 못해 검게 멍들어 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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