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문학기행 2편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총 5부를 26년간 집필했다고 한다. 원고지 31,500매, 등장인물 총 700명 1897년부터 1945년까지, 무대는 하동 평사리에서 만주 간도 땅까지. 이쯤 되면 시공간적으로 장대한 스케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토지를 <大河小說>이라 한다.
그런데 왜 제목을 '토지'라 했을까? '대지'도 아니고 '땅'도 아니고 왜 '토지' 란 명칭을 붙였을까?
대지는 그냥 광활한 공간을 말한다. 삭막하다는 느낌을 주는 용어이다. 땅은 하늘의 대척 개념이다. 존재론적 개념에는 살아있는 인간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러면 '토지'는 어떤가? 토지는 소유개념이다. 임자가 있다는 말이다. '所有'에는 소유자와 非소유자의 대립과 갈등이 있고 인간의 욕망이 살아 꿈틀거린다. 작가는 인간의 삶을 시대적, 역사적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역사적 개념으로서 '土地'를 사용했을 것이다.
토지를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않은 자와의 관계를 시대와 역사를 가지고 교직하며 쓴 것이 장편소설 <토지>라고 본다.
그런데 토지는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많은데 왜 하동 악양 평사리를 무대로 삼았을까? 이에 대해 작가의 육성을 들어보자.
"내가 경상도 안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으려 한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통영에서 나서 자라고 진주에서 공부했던 나는 <토지>의 주인공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써 경상도 이외 다른 지방의 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석꾼이 나옴직 할 만한 땅은 전라도에나 있었고 경상도에서는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평사리는 경상도의 어느 곳보다 넓은 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섬진강의 이미지와 지리산의 역사적 무게도 든든한 배경이 돼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평사리를 토지의 무대로 정했다." (평사리 라는 그곳 - 최영욱)
실제 평사리를 가보니 작가의 말에 공감이 갔다. 나는 소설 '토지'의 생명력은 역사성에 있다고 본다.
최참판 댁 3대에 관한 가족사이지만 거기에 시대와 역사의 옷을 입혔다. 작가의 구상이 탁월한 대목이다. 나는 예전에 토지를 읽으면서 사마천의 '사기'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 토지문학제에서 작가가 사마천을 생각하면서 토지를 썼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작가는 자신의 처지를 사마천에 비기면서 사기 같은 大名著를 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던 것이다.
작가는 왜 사마천을 언급했을까. 사람들은 작가의 삶이 사마천처럼 힘들고 고단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나는 두 사람의 삶도 그렇지만 대하소설 토지가 사마천의 사기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서이면서 문학서이다. 토지 또한 문학이지만 역사서라고 생각한다. '사기'와 '토지'는 모두 인간의 존재론적 명제를 던져 주고 있는 인간 중심주의 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