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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자 Oct 13. 2024

복사골  큰 대문집

내가  태어난 백일즈음 우리 부모님은 평안도에서  서울로  이사 오셨다.나는 6.25 후  부산  피난민 생활을 마치고 서울 효창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가을에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전근이되어  새어머니와  지방으로  떠나시고 할머니와  삼촌.나와 동생은  소사 복사골로  이사를 했다.

그 곳엔  초가집이  많았었는데   우리집은 마당이  넓은  기와집 이었다.집앞에  야트막한  산이 보이고  길가  큰 은행나무옆에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우리집 마당엔 커다란  사철나무와  찔레꽃나무옆에  장독대와  닭장이  있었고 텃밭도 꽤나 넓었다. 모든게  신기할  뿐이었다.직업군인이던  삼촌은  주로  주말에 오셨고  할머니와  동생과  나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  되었다.미처 전학하지 못한  며칠사이 새 학교가  너무  궁금하여  앞집  꼬마를 앞세우고   새 학교를  찿아 나섰다가   큰 고생을 했다.다리  아프다고 우는  지숙이를  업고  걷다가  엉덩이 아래 까지 흘러 내려간  지숙이를  치켜업는다는  것이  지숙이를   길옆  시궁창에  던져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시궁창 흙으로   범벅이된  지숙이를  업고  집에 올때까지  둘은  함께  계속  울었다  조용한   남동생과  달리  덜렁대는 나는 자주  일을 치는 편이었다.  윗동네  까지 가서  사내아이들과   싸우고   울며불며  집에  와서는  할머니에게  생떼를 쓰기도했다. 새봄에  학교에 들어갈  동생을 툇마루에  앉히고 한글공부  가르치다  밥상과  함께 동생이  떨어지는 바람에 할머니가  놀라기도  하셨고  어느날은 학교운동장에서   동생을 그네에 앉히고   힘껏  밀었더니  엉덩이를  쑥빼고  앉았던 동생이  떨어져  울고  그네만  높이  올랐던   일도 있었다.  이른 봄엔  손튼다고  걱정하시는  할머니  몰래  신문지와  나무꼬챙이를  들고  보리밭으로  냉이를  캐러 다녔다. 여름방학때   동네  사내애들과   은행나무   오르기를 하며놀았는데 다음날 아침  얼굴이  두배나 되게  퉁퉁붓고  좁살같은것이   얼굴을  덮었다. 부끄럽고  무서워서  서럽게 울었다. 은행나무에  치성을  드려야  한다,앞산 약수를  떠다  먹고  씻어라  동네 아줌마들의  의견은  분분  했지만  병원치료  삼일 만에  깨끗해졌다.


어느 이른봄  새벽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서울에서  삼촌  친구분이  택시를  대절해  오셨다.삼촌이  위독  하시단다  할머니는   급히 택시로 서울에  가셨다.낮에   친척분이  오셔서  우리를  보살폈다.  약혼중이던 삼촌은 그렇게  너무도  갑작스럽고  허망하게  서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삼촌은  결혼도  못하시고  새집  단장도  채  다못하신채  할머니  가슴에   못을박고  떠나셨다. 그후  할머니는  물만  밥에도   목이  메이는  삶을  사시다  가셨다.동네  아줌마들은  우리집터가  세다고  수근거렸다.

폭풍같은  시간이  흐르고  야속한 봄은  아무일도  없었던듯   꽃망울을 터트리며  화사했다.가는곳마다 복사꽃이  만발하고.  할머니도  텃밭에  각종  푸성귀씨를  뿌리고  꽃을 심었다.  여름이되자  마당에는 채송화. 봉선화.할련화  맨드라미.백일홍 분꽃등이피고  지면서  꽃들의  향연이  시작   되었다. 할머니는  내손가락에   빨간  봉숭아물을  들여주셨다.나는  닭장에서  따듯한  계란을  꺼내   오는것도  좋아했다

저녁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밤에는  달님과  함께  올때도  있었다. 높고 밝은 달은  내보폭을  맞춰주며  바래다  주었는데 내가 잠시   쉬면  달도   따라  쉬었다.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나무꾼들은   솔잎을 큰 이불채  모양으로  반듯하게  다듬어 지고  다니며  팔았다.그  솔잎으로  아궁이에  불을붙여  부지깽이로  살짝들어주면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운  솔잎 불길이  계속  일어났다.  할머니는  고구마를   구워  재에  묻었다가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긴식으로  주셨다. 개울물이  꽁꽁  얼면   동생과 나는  아버지의  헌구두를  신고 얼음을  지치며  놀았다.

어느날   딱 한번   삼촌의  약혼녀가  다녀갔다.그분과  할머니는    말없이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밤에  할머니 드시고  주무시라고 포도주와  분유와 우리들  과자를  사오셨다.동생과 나는  미제  쵸코렛과   과자를  먹으며  참으로   행복했다.  

그곳에  사는동안  우리남매는  소꼽놀이도  하고  자잘한  말썽도   부리면서   마냥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할머니는  일마다  때마다  눈물을 보이셨다.  떠난 사람과   남은사람   가슴아픈   노모와  행복한  철부지들이  함께  세월의  장을   넘겼다.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이 나고 내가 서울에있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새어머니와의  생활이  시작 되었다.  어린시절  수많은  유년의  추억  그  추억의  편린들은  마음속  보석상자에  가득하다. 원초적인   고독으로  내영혼이   야위어  갈때. 피곤한   삶의  굴레에서  해방되길  간절히  갈망할때,어이없는  시행착오로  생활이   버거워질때,  그때  나는   복사골  큰대문집을  생각한다.아지랑이처럼  할머니의  얼굴이   피어나고,  나는  어린시절 그많은  추억속으로  빠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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