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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을 지우다 / 명정을 묻다

by 허진년

목록 지우다 / 허진년


세월이 거품을 둥글게 말아 올리고

물색없이 마른 장맛비 내려서던 날

피안의 언덕배기 콩밭 메러 나가시는 아버지는

도포 수의자락을 잡아 당겨도 헛기침만 하시더니


젖은 속눈썹 사이만큼 하늘 오려 내어

주름으로 목록을 지우셨다


상주 곡소리 희미해지는 시간쯤에

상석에 놓인 저승길 노자 지폐 몇 장으로

흙을 쓸어내던 인부들이 허리 펴고 일어나자

신도시 아파트 닮은 묘비가 일어나 앉는다

陽川許公永和之墓


제사상이 다리를 접어 돌아앉고

낡은 4평 평상 1/2를 차지하고 다리를 펴는데

건너편 칡넝쿨은 강물 되어 흐르고

모든 기억에서 관계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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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銘旌을 묻다 / 허진년


나무아미타불


끊어진다는 것은 슬프다

비 내리기 전 오월에 어머니는 안개가 되었다

촘촘한 떡갈나무 잎처럼 숱한 세월을 기록하시고

실눈으로 세상을 점검 하시고 눈을 감는데

문신 눈썹만 뚜렷하게 남았다


명정을 덮어 봉분을 만들고 일어서자

상석 아버지 이름 석 자 여백에

어머니 이름이 새순처럼 돋아났다

마른 먼지 방향을 잃어 더듬거리고

양친 부모 여위었으니 고아 아닌가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장의버스 낡은 테이프는

아직도 명정 앞세워 뒤를 잡는다


주) 아버지 돌아가시고 정확하게 1년 후,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가셨다.

장례식 슬픔 속에서다 당일의 슬픔을 글로 남겼다니~

한편, 저렇게 글을 남긴 나에게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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