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쌀쌀히 맑아서 긴팔입으면 시원하고 따사로움
이번 주는 임시공휴일과 개천절 덕분에 여기저기 뛰엄뛰엄 출근하고 쉬어서 일을 제대로 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10월 10일까지 끝내야 할 업무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 사이에 급히 들어오는 업무도 잔뜩 있지만, 나는 속도를 내지도 않고 그냥 어정거리고 있다. 의지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렇게 일기를 쓰며 답답함을 털어내고 싶을 뿐이다. 무언가 꽁꽁 숨은 것 같은 내 마음속을 미안하지만 무차별적으로 파내어 여실히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렇겠지.
계절옷을 정리하겠다고 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옷장은 여전히 엉망으로 방치된 상태다. 애매한 날씨 탓인지, 일교차를 핑계 삼아 정리를 미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 방을 어떻게 정리할지 생각하게 된다. 만약 옷장 칸이 5개~6개쯤 된다면, 잠옷, 바지, 상의, 겨울옷, 수영복 이런 식으로 나눠 넣어야 할까? 잠옷을 좋아해서 잠옷이 많다 보니 이 부분이 가장 큰 고민이다. 하라는 일이나 안하고, 이렇게 집에서 뭐할지 뭐먹을지 재밌는거 없는지나 생각하는 내가 참 인간말종같다.
상사가 시킨 일도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렵기도 하고 진도도 나가지 않는다. 그냥 다른 일을 먼저 할까 싶다가도, 결국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요즘은 시도 잘 써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보고 무조건 시를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더 안 써지는 것 같다. 글을 쓰고싶다는 집착 때문에 그런것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퇴근하기 전, 어두워진 오후 6시의 하늘을 보며 까만 밤이 다가오고, 구름이 회색으로 물들어가는지 아니면 석양이 산 뒤로 넘어가면서 구름의 노란 빛을 빼앗아 가는지 생각했다. 닭과 달걀 중 무엇이 먼저냐는 질문처럼, 색이 빠지는 게 맞는지 물드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구름이 가장 다양한 색을 띠는 시간은 역시 일몰과 일출일 때인 것 같다. 이걸로 시를 써볼 수 없을까 생각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과 집착이였다. 시는 그걸로 문뜩 떠오르는 마음이나 생각을 써내는거지 저것을 어떻게 조리해볼지 고민하면 이미 망해버린 시다. 다른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의 시 제작은 저래서는 안된다.
오늘도 나는 점심을 먹지 않는다. 영 밥이 땡기지 않는다. 잘 먹어야 뭐든 잘된다고 했지만, 먹는 것조차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집에 가면 폭식하고, 그러니 몸무게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걸 알면서도 이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체하는 것 보다 나으니까 그런가, 어쨋든 편안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나는 지금 아무도 모르게 하늘을 지고 있는 아틀라스가 된 것 같다. 나를 벌준 사람이 누군지 모른채로 짊어진 하늘을 땅에 내려두지도 못한채로 정처없이 그냥 어깨만 여실히 아픈 아틀라스가 된 기분이다. 아틀라스는 제우스를 미워하도 할 수 있지, 나는 뭘 미워해야 하는지 모르겟다.
얼마 전 추석 즈음에, 근무를 일찍 마치고 회사 1층에서 무려 3시간이나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대표님은 누구나 품고 있는 사직서 같은 거냐며 다정하게 물으셨다. 그냥 털어놓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나는 경영진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아무에게나 아무에게나 하소연하기 어려운 입장이기 때문이다. 대표님은 그런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무언가 답답해지신것인지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는 말씀에 '그래도 이렇게 들어주시잖아요' 라는 말로 감사한 마음과 해결을 바라는건 아니라는 의미를 같이 전했다. 대표님도 자신의 속상한 이야기를 나에게 살짝 털어놓으셨다. 다른 직원이었다면 그러지 않으셨겠지만, 나는 대표님 외에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고 대표님도 마찬가지셨을지 모르겠다. 이사님은 업무에 시달려 미치기 직전이라, 내가 힘들다고 하면 더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았고, 보통의 직장에서는 그런 말을 상사에게 하는게 아니니 그냥 참고 도와달라고 한다거나 어떻게 말할지 몰라 그냥 꾸역꾸역 조언도 못받고 해냈다만, 대표님은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실 수 있는 어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어쩌면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필 대표님이셨던 것 같다.
행복하려고 일을 하지만, 일하는 게 행복하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돈이 없어서 행복할 수 없다는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내가 왜 살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다. 그렇게 말을 이어가니 '우리회사가 너한테는 처음 다니는 제대로 된 직장이지?' 라고 하셨다. 대표님은 본인이 손 10뼘만큼을 이미 와봤기 때문에, 지금 한 뼘에서 겪는 어려움도 결국 지나갈 길이라는걸 알고 있어서 별로 멀어보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앞으로도 최소 9뼘 이상은 더 나아갈 여유와 확신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경험에서 얻은 확신과 안도감은 시간만이 해결해준다는 말씀이 특히 와닿았다. 나는 아직 지나온 길이 너무 짧아서 더 멀리 갈 수 있을지 두려운 것이라고, 대표님은 이해해주셨다. 10뼘을 이미 걸어본 사람은 1뼘 정도는 별로 멀어보이거나 고단해 보이지 않지만, 1뼘밖에 가보지 않았으니 당연한것이라고, 힘 빼고 걸으라고 하셨다.
나는 이제 고작 직급 하나를 달았고, 스물여섯이기 때문에 지나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다. 그래서 앞으로의 길이 너무 멀어 보이고, 가끔은 그 길을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 그래도 대표님의 말을 듣고 조금은 위로를 얻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아서 그렇다"는 말 덕분에, 일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지만 미적미적 조금씩 해내는 힘을 얻은 것 같다. 걷다 보면 결국 그만큼 걸어지기 마련이다. 걸음에 너무 힘을 싣지 말라는 말이 특히 좋았다. 지금까지도 걸어왔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조금씩 걸어보려고 한다.
어른들은 좋은 직장과 좋은 자리를 가지지 않으면 한심하게 본다. 고생한 만큼 보답받지 못하는 것을 멍청하게 생각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로와 위안이 필요한데, 어른들은 자랑과 위선, 그리고 비웃음만 남기고 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그래도 대표님 같은 분을 만난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번아웃이 오고 일하기 싫어도, 그래도 일단 할 일을 하려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밥맛은 없지만, 먹힐 때 한 입이라도 먹고, 잠은 오지 않지만 눈을 감고 최대한 좋은 생각을 해보려 한다. 나도 참 불만이 많은 것 같다. 옷장 정리도 못하고 방 정리도 못하면서 남 탓이나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드라마 '안나'에서 나왔던 "내가 불행하면 남에게 관심이 간다"는 대사를 들었을 때, 나는 어떤 불행으로 인해 남에게 관심을 끄려고 하나 생각했다. 아마 나는 불행한 게 아니라, 배가 불러서 이런 무력함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의 현타는 행복하고 평온한 일상에 적응하지 못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불행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불행에 푹 절여져서, 이 행복한 공기가 너무 너무 낯설고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런것이라면 그 몹쓸 불행에 절여진 이 몸뚱이를 빨리 씻어내야겠다. 불행에 너무 익숙해져서 평온하고 당연하고 잘 해내는 이 삶이 불안하고 적응되지 않는 것일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