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휴가 나왔어. 김치찌개 끓여줘.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내가 종로에 '기억요리사'라는 이름을 걸고 첫 주문을 받은 음식은 김치찌개였다. 그 김치찌개는 어느 한 군인의 어머니께서 만든 김치찌개였다.
....
2007년 9월 12일 나는 종로구 서촌 대오서점 근처에 '기억요리사'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내 친구 해한이와 이사가 축하를 해준다고 방문을 했다.
"개업 축하한다. 억해."
무해한 다음으로 친한 내 친구 '남이사'가 꽃 화분을 하나 사 왔다.
"오는 길에 길가에 있길래 화분에 담아왔다."
"재밌나? ㅡ_ㅡ;; 자리에 앉아라."
"근데 테이블이 하나면 장사해서 머 먹고 사노?"
'남이사 니는 몰라도 된다.'
"그냥 원테이블 레스토랑을 하고 싶어서..."
"근데 해한이랑 억해, 느그들은 학교도 휴학하고 어쩌려고 그라노?"
"응 우리는 그냥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젊을 때 한번 해볼라고."
그때 해한이가 가게로 들어왔다. 해한이는 내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아는 친구이자 나의 어릴 적 친구이다. 백해중 가장 무해한 내 친구, 초등학교 입학식날 내 옆에서 코 흘리며 서있던 그 모습, 나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 모습,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중에 해한이는 나의 이름을 물었다.
"야 니 이름 뭔데? 내는 해한 이다."
"내? 내는 억해다."
"억해?"
"응, 기억해."
"그래, 내 후문 앞 요 산다. 친하게 지내자."
"그래 나는 부전시장 근처에 사는데."
그 후로 해한이와 나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해한이의 이야기를 서두부터 꺼내는 이유는 내가 이렇게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2007년 세는나이 20세일 때의 일이다. 우리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을 했고 같은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2007년 4월 5일 목요일, 서울 아침 최저 기온 2도, 낮 최고 기온 13도의 봄날씨라고 하기엔 조금 쌀쌀한 날이었다. 해한이와 나는 수업이 끝나고 함께 명동 맥도널드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맥도널드 앞에 도착하니 맥도널드가 폐업을 한 것이었다. 참고로 3년 후에 맥도널드는 다시 명동점을 오픈했다.
"마, 해아이, 맥날 문 닫았다."
"헐, 뭔데! 요즘 임대료가 엄청 오르더니 천하의 맥도널드도 여지없네."
" 오늘 봄인데, 와...추바라.!"
"아씨..어데가지?"
"일단 편의점에 들어가자."
그랬다. 그날 맥도널드의 폐업은 우리의 인생을 바꿨다. 우리는 추위를 높여줄 따뜻한 레쓰비를 하나사고, 로또를 샀다.
4. 5. 15. 16. 22. 42
"억해! 1등 되면 알제? 반띵인 거!"
"좀.! 일단 3등이라도 되고 말하자."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번호가 227회 차 로또 1등 번호였다. 3개월이 지난 여름 방학 때 우리는 우리가 산 로또가 1등에 당첨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총 1등 당첨금 '52억 5354만 2400원'.
2007년 8월 3일 금요일 해한이와 나는 1등 당첨금을 수령하고 과호흡이 왔다. 손이 떨리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때 정확히 당첨금의 반을 나눴다. 해한이는 그 돈으로 주식 계좌를 하나 만들었다. 뭔 애플컴퓨터인가? 거기에 투자하려고 한다는데 난 주식은 잘 몰라서... 우리는 그때 이것을 평생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나는 그 1등 당첨금 중 일부를 사용해 가족들 몰래 종로에 작은 가게를 하나 샀다. 종로구 서촌 자하문로 7길의 대오서점 인근의 작은 건물을 구입했다.
오늘 인테리어를 끝내고 개업을 하는 날이다. 사실 원테이블 레스토랑이라 개업식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긴 하다. 이 동네에 내가 인테리어공사를 시작하면서 주위 분들은 젊은 총각이 장사도 잘 안 되는 동네에 왔다고, 왜 북촌을 가지 여기로 왔냐고들 하셨다. 나는 그냥 서촌이 좋았다. 나는 내가 가진 능력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볼 수 있다는 이유도 있고, 내가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있다. 사람들이 많으면 내 머릿속은 너무나 복잡하다. 그래서 나는 서촌을 좋아한다. 그것도 특히나 대오서점은 나의 최애 서점이다. 이제는 없어져 가는 동네 서점들이 너무나 아쉽다. 예전에 집 근처에 꼭 하나씩 서점이 있어서 잡지책이며, 소설, 시집등을 사서 보곤 했는데 요즘은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인터넷으로 읽다 보니 서점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암튼 대오서점이 좋았던 나는 자하문로 7길의 대오서점인근에 '기억요리사'의 문을 열었다.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우리 모두 놀라서 돌아봤다. 근데 특해누나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기특해/기본기씨의 장녀-서울 남자와 결혼하고 현재는 현모양처/슈퍼우먼(?)으로 사는중)
"어어어어어...누나야."
"억해 니는 이런 가게를 차리면 말을 해야지. 내가 니 친구한테 들어야 겠나?'
해한이는 홀로 가게를 차리는 내가 걱정스러워 우리 집 첫째 딸인 나의 누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마..해아이"
"미안....누나가 그래도 일은 잘하시잖아. 힘든 거 있으면 누나한테만 이야기해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가 어릴 적부터 맞벌이를 하셨고, 누나는 그런 우리 집의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
'기특해' 씨이다. 누나는 집안 가사 노동에 도가 튼 사람이다. 요즘 말로 달인이다. 누나는 서울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다. 누나는 약간은 얼빠진 얼굴로 가게로 들어왔다. 우리는 서로 어색하게 앉아서 아무 말이 없었다.
누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근데 니 학교는 안 다니고 가게 차린 거가? 돈은 어떻게 구했노?"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학교는 잠시 접었다. 북촌한옥마을 때문에 여기 서촌은 임대료가 싸다."
나는 이리저리 둘러대느라 바빴다. 암튼 누나는 다른 것보다 내가 망해서 가계 살림에 누수가 생길까 걱정이다. 나는 친구들과 테이블에 앉아서 20분을 넘게 특해누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얼마나 많은 잔소리를 들었는지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나도 다 기억을 못 할 정도다.
"누나야. 이제 고마해라. 다들 마이 묵읏다. 아들 이제 잠온다. 가서 자야지."
나는 서둘러 이 자리를 파하길 원했다.
"그래 오늘 와줘서 고맙다. 다들. 집에 잘 들어가고 나는 가게 정리하고 알아서 들어갈게. 해한이 니는 어차피 나랑 같이 들어가야 하니깐. 딱 기다리고. 다 가고 나면 얘기 좀 하자"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손님이 없는 테이블에서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누나와 이사가 돌아가고 나는 해한이와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철컥"
"왜 머 나두고 갔나?"
......
"안녕하세요. 혹시 식사가 가능한가요?"
"아... 어서 오세요. 아직 준비 중이라 식사가 안될 것 같은데 어쩌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너무 늦은 시간에 왔습니다."
그 순간 나는 그분과 눈이 마주쳤고, 그분의 기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현재 군인이고 얼마 전 어머니가 사고로 강북삼성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지금 의식이 없으신 체 중환자실에 누워계신다. 나는 그를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나가려는 그를 붙잡아야 했다.
"혹시 잠깐만 앉아보시겠어요."
"아.. 네. 식사가 가능할까요?"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고 준비를 할 수도 있을듯합니다.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나요? 저희 식당이 원테이블 식당인데 메뉴판이 있는 것은 아니고, 손님이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 드리는 곳이거든요."
그러자 그 남성분은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김치찌개요."
한국인의 소울푸드"김치찌개" 사실 너무나 간단하지만 맛을 내기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음식이다.
나는 요리를 준비하면서 그에게 왜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금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사실 김치찌개는 저희 어머니가 저에게 항상 해주시 던 음식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사별을 하시고 지금까지 저를 훌룡하게 키워 오셨어요. 어머니는 시장에서 야채, 과일노점상을 하시며, 새벽일찍부터 나가시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없는 돈으로 꼭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여 놓고 나가셨고, 어릴 때 김치찌개가 죽도록 싫었습니다. 제가 군인인데 오늘 첫 휴가를 나오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나 또한 그 눈물을 멈추라고 할 권리가 없었다. 한 15분쯤 혼자서 울 수 있게 주방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는 그리 크게 울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그 감정은 귓불을 스치며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나는 그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어머니의 김치찌개 레시피를 볼 수 있었다. 그 레시피는 너무나도 간단하지만 정성이 가든한 레시피였다. 없는 돈에 어머니는 아들에게 고기라도 한점 먹이기 위해서 장사를 끝내고 돌아오던 길에 꼭 목전지와 앞다리살이 만나는 그 부분의 돼지고기를 300그램을 사 오셨다. 그리고 혹시 돼지비계가 조금 얻을 수 있으면 100그램만 달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집에 오셔서 돼지기름 100그램을 먼저 중간 불에 올려서 기름을 내셨다. 손질하시고 남은 파를 모아 오셔서 깨끗이 씻으셔서 돼지기름에 같이 넣어서 기름을 더욱 풍미 있게 만드신다. 그리고 김치는 서울 김치로 젓갈이 많이 사용되지 않은 담백하고 시원한 배추김치를 사용하셨다. 배춧잎보다는 배추줄기 부분을 많이 사용하시고, 배추꼬다리는 얇게 썰어서 같이 넣으신다. 여전히 중간 불에 김치와 파 돼지기름은 천천히 끓어간다. 튀기는 것이 아니라 기름을 끓이면서 배추를 익힌다. 눈대중으로 기름은 약 110도가 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돼지고기를 같이 넣고 양파를 채 썰어 넣는다. 그리고 화력을 최고로 올리고 양파가 겉에 기름이 스며들면 물을 1리터를 넣으신다. 물론 물은 원래 500-600미리리터가 가장 적당하지만 어머니는 내일 아들이 아침저녁을 먹을 수 있게 물을 넉넉히 넣으시는 것이다. 어머니는 설탕이나 식초등은 넣지 않으셨다. 그 당시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멸치 다시다를 1/2 티스푼을 넣으셨다. 거기에 김치국물을 조금 넣으시고 마늘 1큰술과 파 적당히를 넣으셔서 15분을 더 끓이시고 소금으로만 간을 하셨다. 그렇게 뚜껑을 덮고 그 다음날 아침까지 열지 않으셨다. 내가 만들고 간을 봤지만 너무나 깔끔한 맛을 내는 레시피이다. 어머니는 완도 돌김 두장을 구워 16조각으로 자르고, 계란 후라이 두 개를 반숙으로 구웠다. 여기에 고구마 줄기 볶음을 함께 밑반찬으로 내었다.
"여기 식사 나왔습니다. 일단 드셔보세요."
"아... 감사합니다. 저희 어머니의 김치찌개랑 많이 비슷하네요. 어머니께서는 김치찌개를 끓여서 꼭 계란 후라이 반숙 두 개와 김을 함께 주셨어요. 이 조합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는 조합일 것입니다. 반숙을 밥에 넣어 같이 비벼서 김에 싸서 한 입 먹고 돼지고기와 김치를 국물과 함께 떠서 먹으면 그 어떤 밥반찬보다 맛있어요. 이런 식으로 먹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원래 하던 건가 봐요. 사장님도 이렇게 내주시니까요."
"네, 어떤 분이 가르쳐 주셨어요. 이렇게 하면 누군가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말없이 김치찌개를 먹고 눈물을 훔쳤다. 역시 김치찌개가 양이 많기 때문에 남기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계획되어 있던 것이다. 어머니는 장사에서 돌아오셔서 그날 아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날 먹을 것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분이 그것을 남길 줄 알았다.
"남겨서 죄송합니다. 맛이 없는 게 아니라 배가 생각보다 부르네요."
"네.. 괜찮습니다. 남기셔도 돼요. 어때요. 어머님의 김치찌개와 비슷하던가요?"
"아..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거의 90% 이상 비슷했습니다. 당연히 저희 어머니 김치찌개를 드셔보지 않으셨으니 똑같을 수가 없죠. 그래도 맛있었습니다. 그럼 얼마인가요?"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계산은 내일 아침에 오셔서 해주세요."
"그게 무슨 소리신지... 내일 계산이라뇨?"
"주문하신 김치찌개가 남았으니 제가 내일 아침에 데워드릴게요. 아침 9시까지 다시 오세요. 그 아침을 드시고 계산을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날세시고 아침에 밥 먹을 때가 잘 없으니 여기 오셔서 아침 드시면 됩니다."
다음날 그는 8시 57분에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 앉았다. 나는 일단 차려진 밥상을 그에게 전달했고, 추가적인 설명은 없이 그에게 아침 식사 맛있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식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고개 숙여서 울고 있었다. 내가 주방에서 나가니 그는 말없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하였다.
"어떻게 저희 어머니 김치찌개랑 맛이 똑같을 수가 있나요?" 그는 약간은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이어서 그에게 이야기 했다.
"어머니의 김치찌개는 하루가 충분히 지나야 그 맛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어머님은 김치찌개를 끓이실 때 돼지기름을 충분히 내시고 그 기름이 충분히 김치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 저녁 늦은 시간에 장사를 다 끝내고 돌아오셔서 본인도 피곤하실 텐데도 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고 싶은 마음에 미리 끓여 놓으시고 그 다음날 데워서 아들에게 줬습니다. 어머니는 귀찮아서 미리 전날에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장 맛있는 김치찌개를 아들에게 먹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어머니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식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아마 어머님께서는 인생을 사시면서 본인이 아드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아시고 김치찌개라도 최선을 다해서 끓이신 것이 아닌지 생각됩니다."
나는 그의 인생에 더 깊이 관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하고 싶었던 많은 말을 멈췄다. 그는 그렇게 어머니가 누워계신 병원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어머니는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다. 내가 본 그의 마지막 기억은.... 침대 앞에 앉아서 우는 모습이었다.
"엄마 나 휴가 나왔어. 김치찌개 끓여줘."라는 말과 함께
1화 끝